[배창호 40주년] '아줌마用' 한국영화 판도 바꾼 '한국의 스필버그'
28일까지 CGV 용산 등서 회고전
'꼬방동네사람들' '깊고 푸른밤' 등 7편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 배창호 감독은 1980년대 충무로를 먹여 살린 거장이다. 당시 한국 영화는 아줌마들이나 보는 문화로 치부됐다. 장르 관습을 축적하지 못해 매력 발산에 실패했다.
배 감독은 날렵하고 빠른 할리우드 영화의 틀을 빌려 대중성을 회복했다. 영화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경쟁력을 키울 토양을 제공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배 감독의 작품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재조명된다. 영화사 스튜디오보난자와 미로비젼이 오는 28일까지 2주 동안 CGV 용산·압구정·서면·대구아카데미·천안에서 ‘배창호 감독 기획전’을 한다.
‘꼬방동네 사람들(1982)’과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젊은 남자(1994)’ ‘러브 스토리(1996)’ ‘정(2000)’ 등 일곱 편을 상영한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배 감독이 스물아홉 살에 만든 데뷔작이다. 당시 한국 영화는 제작사가 외화 수입권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에 불과했다. 열악한 제작 구조, 엄혹한 검열 등의 제약도 여전했다. 배 감독은 용기 있게 도시 빈민의 실제 삶을 다룬 영화를 추진했다. 문화공보부는 시나리오를 다섯 번 반려했다. 예순 군데를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배 감독은 멜로 드라마로 틀을 새로 짰다. 회색빛 사랑 이야기의 바탕에 사회적 리얼리즘을 깔겠다는 전략이었다.
배 감독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빈민의 척박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동변소를 이용하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는 사람들. 공동 빨래터에서는 아낙네들이 팬티 한 장을 두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강인한 공동체적 기운은 병신춤 문화재 보유자인 공옥진의 춤을 통해 축제로 승화된다.
그 위에 그려진 멜로는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검은 장갑이라 불리는 아낙네(김보연)가 두 남자(안성기·김희라)와 이별과 재회를 반복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 류의 익숙한 멜로드라마 감정선으로 사회비판적 시선에 힘을 보탠다.
배 감독은 훗날 ‘이장호 vs 배창호’에 이렇게 회고했다.
"야심만만하고 패기에 찬 젊은 신인 감독으로서 멜로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이 어쩐지 자신을 비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마지막 시나리오가 정리되고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무겁고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 강하고 슬픈 멜로드라마로 바뀌었더라. 완성된 영화가 처음 의도한 것보다 더욱 내 체질에 맞고 대중에 호소하는 힘도 크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발견하게 됐다."
재능 있는 스토리텔러로서 능력은 ‘깊고 푸른 밤’에서 절정에 달했다. 당시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미국에서 촬영된 세련된 화면과 장미희의 매혹적인 연기, 아메리칸드림 비판 등의 메시지가 대중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특히 데스밸리에서 촬영한 마지막 장면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1974)’에 비견된다는 극찬까지 받았다.
내용은 원작인 최인호의 단편소설과 상이하다. 최인호는 1970년대에 큰 인기를 누린 소설가와 가수가 미국에서 재회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에서는 아메리칸드림을 동경하는 백호빈(안성기)이 한국인 여성 제인(장미희)과 위장 결혼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과정이 담겼다. 백호빈은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한 사랑을 느끼는 제인을 무시하고 외면한다. 그 순간 아메리칸드림의 파멸과 사랑의 불모성은 묘하게 짝을 이룬다.
배 감독은 대중영화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온갖 양념을 배제하고 동양의 정신세계를 탐구한 ‘황진이(1986)’로 충무로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고, 일상적 질감과 양식의 조화가 어우러진 ‘기쁜 우리 젊은 날’로 서민층의 일상생활 묘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다.
스토리텔링보다 이미지를 앞세운 길 위에서 흥행 감독의 명성은 조금씩 잊혔다. 정작 배 감독은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외적 상황의 불리 속에서 오히려 더욱 담백해졌다. 김영진 평론가는 그 궤적을 이렇게 요약했다.
"대중영화의 영토를 벗어나 자기만의 작가적 영토를 개척하는 길에 나섰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는 이후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 수년 전 배창호를 만났을 때 그는 서예 선생에게서 배운 ‘기진무량(其進無量)’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거칠 것이 없다’라는 뜻이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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