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판에 상처받고 떠났던 영화인, 그가 들고온 데뷔작

이선필 2022. 9. 1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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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둠둠> 정원희 감독

[이선필 기자]

 영화 <둠둠>을 연출한 정원희 감독.
ⓒ 영화사 진진
15년을 연출부 그리고 제작부에 몸담았던 한 영화인은 돌연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가 다니던 회사는 국내 최고의 영화투자배급사. 사직서를 내려던 그에게 상사는 "설마 프랑스에 영화 공부하러 가는 건 아니지?"라고 물었다고 한다. 뜨끔하며 한국을 떠난 영화인 정원희는 약 8년을 프랑스에 머물렀고, 세 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15일 개봉한 <둠둠>은 여러 면에서 생각할 거리가 있는 영화다. 전도유망했던 여성 영화인이 내놓은 첫 장편영화인데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던 디제이, 그것도 미혼모 여성 디제이의 삶을 다룬다. 단순한 음악 성장 영화 아냐?라고 의문을 품고 이 영화를 봤다간 테크노 음악이 주는 묘한 감성에, 디제이 이나(김용지)의 선택에 뜻하지 않은 감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여성 서사

<둠둠>을 말하기 위해선 정 감독의 단편 <벨빌>을 우선 떠올려야 한다. 파리에 사는 조선족 쌍둥이 자매가 주인공이다. 언니는 동생의 여권으로 중국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보기 위한 계획을 품고 실행에 옮긴다는 이야기다. <둠둠> 속 이나 또한 정신적으로 불안한 엄마(윤유선)의 강요에도 몰래 자신이 낳은 아이를 위탁모와 함께 키우고 있다. 좋아하던 테크노 음악을 포기한 채 살던 이나는 어느 날 결단을 내리고, 그 책임을 지기 시작한다.

"2016년, 학업을 마칠 즈음 테크노 음악을 가지고 이야길 해 봐야겠다 싶었다. 처음엔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다. 클럽이라는 이미지가 한국에서 좋지도 않고, 파티에 대한 이미지도 왜곡돼 있어서였다. 고집을 부렸다. 첫 장편이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작은 규모로 해보자. 삼대 모녀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 엄마를 이해해보려는 딸, 근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적 가정은 아닌 상황에 놓여 있다.

아무래도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큰 것 같다. <벨빌> 주인공도 조선족이고, <둠둠>에도 태국인 여성이 등장한다. 우리가 보는 시선과 그들 시선 사이의 괴리감이 꽤 크다. 제 또다른 단편 <프랑소와>도 프랑스 입양인 이야기다. 다들 그 나라에서 이방인이지만 한 사람으로 살려고 하는데 이들을 보는 시선에 편견들이 있다. 영화에 그런 부분도 녹이고 싶었다."

감독 말처럼 <둠둠>엔 오랜 시간 감독이 품었던 이방인에 대한 시선, 그리고 미혼모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다. 관객 입장에선 마치 거울처럼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영화 <둠둠>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그리고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음악이 있다. 일렉트로닉 계열 음악에서 테크노는 일종의 비주류다. 강남이나 홍대 클럽가에 울려 퍼지는 EDM(Electronic Dance Music)이나 힙합과 달리 테크노는 흥을 발산하기엔 적절하지 않아, 소수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는 음악이다. 평소 전자음악은 물론이고 재즈, 록 등 폭넓게 음악을 들어온 정원희 감독은 "뭔가 이질적인 걸 좋아했던 것 같다. 기계음에 리듬도 멜로디도 적은데 테크노를 알게 되면서 듣는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본래 디제잉은 군중을 조종하고 압도하려는 건데 테크노는 듣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춤을 주고 그럴 수 있더라"고 선택 이유를 말했다.

이어 이번 영화 음악 감독을 맡은 하임과 일렉트로닉 밴드 이디오테잎의 제제(신범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배우 김용지 또한 장편영화 첫 주연으로서 직접 디제잉 장비를 사서 꾸준히 연습했다는 후문이다.

"특별한 감독님을 모시려고 진짜 많이 검색했다. 우연히 유튜브 영상을 보고 하임께 연락드렸는데 흔쾌히 좋다고 하시더라. 신범호님도 잘 아니까 같이 하자고 말씀하셔서 하게 됐다. 하임 감독님은 이나의 서사를, 신 감독님은 (이나의 동료) 준석의 서사를 담당했다. 엄청 고생하셨다. 음악이 너무 좋아서 인물의 대사를 넘거나 하면 수정을 요청드렸고, 그런 과정의 반복이었다. 촬영 현장에 오셔서 직접 장비 세팅도 해주시고. 음악인분들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용지 배우님은 테크노보단 힙합을 좋아한다 해서 여러 음악을 접할 수 있게 했다. 직접 수업도 받으면서 엄청 연습하더라. 처음 만났을 땐 밝고 하얗다! 이런 느낌이었는데 그 표정 안에 여러 모습이 담길 수 있겠다 싶었다. 참 밝은 성격인데 내면의 어두움도 잘 표현되면 좋을 것 같아 여러 영화룰 추천했다. 유선 선배님도 참 선하시지만, 동시에 엄마 역할로 무서운 느낌을 주고 싶었다. 대본을 드렸을 때 바로 출연하시겠다고 해주셔서 감사했지. 정말 절 믿어주셨다."

특별한 불안감

정원희 감독은 <둠둠>을 자전적 이야기라 표현했다. 그가 실제로 디제이 활동을 했다거나 한 건 아니고, 이나가 품고 있는 불안감이 감독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닿아 있기 때문이다. "20, 30대를 영화일을 하며 가졌던 불안감,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시선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게 됐다"고 그가 설명했다.

"2004년 영화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그 시스템에선 내가 자신감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장에서 남성들의 성희롱, 성추행도 있었고. 20대 후반에 다른 친구들은 입봉 준비를 하더라. 나도 그래야 하나 싶어 시나리오를 썼고, 단편 하나를 찍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다가 프랑스로 간 후 한 친구에게 보여줬는데 장문의 문자를 보내더라. 뭐가 좋았고, 어떤 부분이 인상적이었는지 그 문자를 보며 소름이 돋았다. 그때부터 용기가 생겨서 내 영화를 보여주기 시작했고, 내친김에 한 편 더 만들었다. 그러다 <벨빌>의 프로듀서를 만나게 돼서 그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영화 <둠둠>을 연출한 정원희 감독.
ⓒ 영화사 진진
<주홍글씨>를 시작으로 여러 한국영화를 경험하며 상처도 얻었지만 오히려 그는 영화를 떠나는 게 아닌 더 다가가는 선택을 한 셈이다. "그땐 영화가 전부였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게 그땐 그랬고, 지금도 영화는 제게 중요한 것이 됐다. 왜 이리 마음에 남아 있는지. 예술을 하시는 많은 분들도 자기 내면의 욕망을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를 하고 싶어 유학을 갔고, 기회가 주어지면 계속 노력하며 만들고 싶다. 어떤 감독이 되고 싶은지는 꾸준히 고민할 부분이다. 저도 이나처럼 뭔가 단단해지는 것 같다."

그는 새로운 기획 아이템을 들고 올 부산영화제를 찾는다고 한다. 성과로 이어질지 미지수이지만 <둠둠>으로 인상적인 창작자의 탄생을 알린 이상, 관심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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