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40>] 술과의 한판승부

데스크 2022. 9. 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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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40화 술과의 한판승부


“고기 좀 먹자. 요즘 영 기운이 없어.”


한종탁은 퇴근길에 노지연의 사무실에 들러 함께 귀가하면서 말했다. 또다시 술 생각이 고개를 들입다 내밀었다. 딱 삼일 만이었다, 작심삼일.


“그럼 고기 사가서 집에서 구워먹어. 나 운전하기 싫으니까.”


한종탁이 술 마시겠다고 먼저 말한 것도 아닌데 노지연은 이미 속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순간 한종탁은 턱까지 치밀어 오른 감동으로 울컥했다. 이렇게 착한 아내에게 정말 잘해야겠다고, 술로 애 먹이는 일은 이제 없어야한다고 다짐하며 한종탁은 기분 좋게 차를 몰았다.

사실 노지연은 한종탁의 음주에 대하여 관대한 편이다. 취해서 추하게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자정 안에만 들어온다면 노지연은 한종탁의 음주를 용인해주었다. 하지만 데드라인을 넘어서는 순간 노지연은 시쳇말로 꼭지가 돌아버리는 것이었다. 폼생폼사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노지연은 한종탁이 취해서 주변에 추한 모습 보이는 꼴을 못 보고, 또 늦게 들어오면 그 걱정에 잠을 설쳐대니 제 성질을 못 이기는 것이었다.


술꾼이 술을 끊는다고 맹세하면 그건 진심이다. 술에 취해 실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차마 사람 대하기가 겁난다. 스스로도 자책과 자괴로 정신없고 또 몸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니까 진심으로 술을 끊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달리 망각의 동물이던가. 며칠 지나면 몸은 회복되고 취중 실수도 슬슬 잊히면서 술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러면 한종탁은 우선 노지연의 의중을 떠본다. 며칠 안 마셨더니 술 생각이 간절하군. 그래도 참아야겠지? 짐짓 비장한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조금만 마시면 안 될까? 소주는 독하니까 막걸리로 말야.


그렇게 몇 차례 애원조로 나가면 노지연은 비교적 도수 낮은 막걸리를 사오라고 허락한다. 이제부턴 일사천리다. 다음날엔 막걸리는 싱겁다며 소주를 마신다. 이제 집에서만 먹을게. 그 다음날 또 마신다. 혹시 밖에서 마시게 된다면 당신이 있는 데서만, 그것도 당신 허락이 떨어지는 자리에서만 마실게. 그렇게 말한 다음날부터 이제 밖에서 마신다. 물론 아내와 동석하지도 아내에게 허락받지도 않았다. 그날은 일차만 하고 집에 들어온다. 술 마시는 법을 알았어. 일차만 하고 오면 되는 걸 말이야. 이젠 나 믿어도 돼.


그렇게 서너 차례 지나고 나면 일차만이 아니라 이차까지 한 상태에서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집에 온다. 휴, 삼차 가자는 걸 억지로 뿌리치고 왔네. 설레발치지만 물론 그런 건 없다. 삼차 가자는 놈이 있었으면 당장 따라갔을 것이다. 사람은 없고 술은 먹고 싶으니 술병을 꿰차고 들어와 핑계 대는 것이다. 나 잘했지? 밖에서 먹는 것보다 그래도 집에서 마시는 게 훨 낫지? 노지연은 속는 건지 속아주는 건지 반병만 마셔, 하고는 자리에 눕는다. 한종탁은 TV를 틀어놓고 노지연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코 한 병을 다 비운다.


“어제 반병 마시고 나머지는 싱크대에 부어버렸어. 있으면 먹고 싶잖아.”


전날 한 병을 다 마시고도 한종탁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유월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한종탁의 음주는 쭉 이어졌다. 백일기도는 이미 한종탁의 뇌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술 약속이 있는 날은 밖에서 마시고 술 약속이 없는 날은 집에서 마셨다. 최근 들어 벌써 두 차례나 연이틀 만취되었다.


“언제까지 내가 술에게 질 순 없다. 꼬리 내릴 수 없다. 사나이 체면에 말이 아니다. 한번 이겨볼 테니까 지켜봐주라.”


한종탁은 술 끊는다는 상투적인 말 대신 술과의 한판승부를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 한 달을 주지.”


노지연이 비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평생 끊게 하지 못할 바에야 술을 이겨내도록 배려하겠다는 의도였다.


덕분에 공인된 음주행각이 시작되었다. 한종탁은 노지연이 준 시간 동안 술과 정면으로 부딪혀 끝내 이겨내리라 마음먹었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 평생의 음주를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면 왜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술집을 찾아 들개처럼 쏘다니는지, 무의식 속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기에 제어가 되지 않는지 만취할 때까지 마시고 그 순간의 기억을 붙잡아서 분석해보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이튿날 기억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필름이 끊겨 블랙아웃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의식까지 관찰하려던 계획은 애당초 무리였던 것 같았다. 다만 성과라면 자신이 자제했어야 할 시점을 찾아낸 것이었다. 일차에서 중단하든지 하다못해 이차에서는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차부터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기억의 암전에 진입하기 때문이었다.


이차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폭주하는 기관차를 세워야 한다. 무의식의 심연에서 자신을 건져내는 게 근원적인 해결책이지만 당장은 어떻게든 물리적으로 정지시키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하여 몇 번의 실험 끝에 내린 결론은 스스로의 의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니 아예 기관차의 연료를 빼내자는 것이었다. 즉 수중에 돈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직장생활 하는 중년남성이 이 방법을 쓰기엔 너무 추해보일 위험이 있었고 결국 의지만이 기관차를 세울 수 있다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의지로써 술을 끊을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금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술을 끊네 마네 입에 올리는 건 스스로 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함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한종탁은 도전을 멈출 수 없었다. 제일 좋은 방편은 최대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술자리에 임하는 것이었는데, 의지라는 건 취하기 전까지만 작동하고 취한 후에는 완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의지가 멈춰선 몸뚱이는 내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늘 당장 술자리가 일찍 파할까 염려하고 있었다.


술꾼들은 그렇다. 월요일은 원래 마시고, 화요일은 화가 나서 마시고, 수요일은 수습하느라 마시고, 목요일은 목이 컬컬해서 마시고, 금요일은 금단현상이 와서 마시고, 토요일은 토할 때까지 마시고, 일요일은 일부러 마시는 게 술꾼들의 요일별 음주행각이었다. 특히 금요일은 말이 필요 없는 날이었다. 불타는 금요일, 술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날이자 두려워하는 날이었다. 한종탁은 일차에서 끝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한종탁은 술독에 빠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느 틈에 술독으로 떨어졌는지 인식하지도 못했다. 하룻밤사이에 이집 저집 이놈 저놈 다 찾아다니면서 술 동냥 술추렴 술 외상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날밤을 새웠고 - 아마 노지연은 한종탁을 기다리느라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새웠을 것이다 -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한종탁은 해장술을 한잔하면서 사태를 가늠해보았다. 이대로 들어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네게 온 거야. 알리바이 성립시키려고.”


한종탁이 꽤나 긴 설명을 마치고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이철백과 방선희가 어이없어하면서도 한편으론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닮아도 그렇게 닮았냐? 김석규 도플갱어라더니 수습하는 방법도 똑같다, 똑같애.”

이철백이 껄껄 웃으며 술잔을 치켜들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슈는 이슈로 덮고, 술은 술로 덮어야지.”


한종탁은 비장한 표정으로 이철백과 잔을 부딪쳤다.



박태갑 소설가 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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