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여왕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과거·현재·미래, 사람들의 가교
우린 대통령도 진영의 수장일 뿐
그러니까 1957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즉위 5년 만의 크리스마스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엔 군주가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섰다. 리더십은 비밀스러우면서도 사적이었다. 나는 여러분을 전쟁으로 이끌 수 없다. 법률을 줄 수도, 집행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난 다른 걸 할 수 있다. 내 마음과 헌신을 이 오래된 섬(영국)에 바칠 수 있다.”
영국 입헌군주제의 요체다. 흔히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reign but not rule)’로 번역되지만, 그보단 미묘하다. 빅토리아 시대(여왕의 고조모)의 지식인인 월터 배젓이 설파했듯, “군주정은 대개는 미스터리처럼 은밀하게, 때로는 꽃수레처럼 행진하면서 권력이 정당화되는 것을 도와주는”(『옥스퍼드 영국사』) 역할을 했다.
여왕은 최적임자였다. 윈스턴 처칠 등 15명의 총리와 거의 매주 단둘이 만나 대화했다(Audience). 때론 격려하고 때론 경고하면서 국정 운영을 도왔다. 때론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신민(臣民)도 잊지 않았다. 종종 지루해 보일 정도로 성실하게 만났다. “여왕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이코노미스트)고 할 정도다. 실제 2018년 한 여론조사에 조사 대상의 31%(64세 이상은 49%)가 여왕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왕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채기 어려운 상태로 남았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특히 쟁점인 경우 더더욱 알기 어려웠다. 의견이 없을 리 없지만, 공개적으로 언표하지 않았다. ‘불평하지도 설명하지도 말라(Never complain, never explain)’가 모토였다. 스코틀랜드 독립을 두고도 그저 “미래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게 다였다.
권력 대신 권위는 얻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 변하지 않은 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버팀목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는 존재였다. 신민 누구에게나 시선이 머무르는 듯한 느낌도 주었다. 여왕 스스로 올해 즉위 70주년을 맞아 방영된 BBC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멀리 과거를 볼수록, 더 앞을 볼 수 있다.” “모두가 함께한다는 마음을 공유하며 70년간의 엄청난 변화에 감사하고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내다보자.”
그렇다고 여왕이 안 변한 건 아니었다. 유럽의 오랜 군주정이 몰락하고 자신의 큰아버지가 여론 악화 속 퇴위해야 했던 걸 기억했다. 왕도 신민들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현재의 상태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표범』)는 걸 알았다. 이번 장례 과정에서 딸인 앤 공주가 여성 왕족 중 처음으로 여왕의 관을 지키는 게 한 예이겠다.
물론 여왕도 실수했다. 여왕 본인은 1966년 웨일스 탄광촌 매몰사고 현장을 빨리 방문하지 않은 걸 가장 후회한다고 했다. 당시 144명이 숨졌는데 열 살 미만의 어린이가 116명이었다. 군주제 자체에 준 충격은 97년 다이애나비의 죽음이 컸을 것이다. 다이애나비가 더는 왕족이 아니었기에 ‘룰(Book)’에 따라 조기를 내걸지도 왕실 입장을 내지도 않았다. 여왕은 스코틀랜드 발모럴성에 머물렀다. 파파라치를 향했던 분노가 이내 왕실로 몰려들었다. 여왕은 이후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영국은 여전히 “태양 아래 계급 문제가 가장 심한 나라이자 속물근성과 특권의 나라”(조지 오웰)인 면이 있다. 시대착오적인 구석도 많다. 그러나 이번 장례 과정에서 보이듯, 과거와 현재·미래 그리고 사람들을 묶어내려는 여러 장치가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다. 여왕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 역할의 정점에 있다.
우리에겐 그런 장치가, 그런 존재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우리 헌법은 대통령이 비록 정파의 수장으로 당선되지만, 대통령으로선 비당파적으로 일하길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하길) 기대했다. 언제부턴가 진영의 수장일 뿐이다. 통합과 결속 아닌 반목과 갈등이 자리한다. 우리 민주주의의 불행이다.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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