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삶의 중심은 동네, 하지만 한 곳에 붙어살진 않았다
얼마나 자주 옮겨 살았나
이 유명한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 때문이었는지 나는 어느덧 조선 사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노자의 말은 실제 국가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작은 나라여야 전쟁도 범죄도 적고 백성들이 편안하리라는 규범적인 비전이다. 그럼에도 ‘농업사회’ ‘정착’ 등의 용어와 함께, 마치 죽을 때까지 이주도 이동도 하지 않고 한동네에서 사는 조선 사람들을 은연중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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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봉건제 비해 이동 자유로워
다른 지역에 가면 호적에서 빠져
세금·부역 등은 마을자치로 결정
자연재해·농지문제로 이삿짐 싸
공동체적 속박 상대적으로 적어
율곡 등 양반도 여러 곳서 거주
」
정월 대보름날 돌팔매 놀이
그도 그럴 것이, 친가는 타성(他姓)이 섞인 동네에서 12대째 살고 있었다. 개울 건너 내가 자란 외가는 조금 달랐다. 외조부께서 고향인 아산을 떠나 다른 친척들이 살고 있던 성환으로 이주한 뒤 50년을 사시다가 만년에 아산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내가 동네 밖으로 나가는 건 가끔 장날에 할머니 따라 나들이하는 게 전부였고, 우리의 삶은 모두 동네에서 이루어졌다. 정월 대보름 동네 싸움을 할 때면 마치 이웃 대정리나 수향리가 무슨 원수라도 되는 듯 돌팔매질을 했다. 수향리 친가의 삼촌은 ‘우리 동네’로 쳐들어오기까지 했다가 나와 마주치고는 씩 웃었다. 어쨌거나 어린 나에게는 늘 그 동네가 그 동네였고, 다른 동네는 거의 갈 일이 없는 ‘타동(他洞)’이었다.
그러던 중 이런 선입견을 깨는 것처럼 보이는 연구를 보게 되었다. 경상도 단성현(丹城縣) 법물야면(法勿也面)의 호적을 자료로 분석할 결과, 1717~1732년의 가계 존속률은 63%, 1825~1840년은 40%였다고 한다. 이는 약 두 시기 15년이 지나자 거기서 농사짓던 농가의 37%, 60%가 사라졌다는 것이다.(이영훈·조영준 2005) 1717년부터 1882년까지 계산하면 7%의 가계만이 존속했다. 이들은 이를 ‘소멸’, 즉 농가가 경제적 자립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이해했다. 다시 1717년 원래 호의 존속기간과 1825년 원래 호의 존속기간으로 계산해보면, 각각 41.3년, 21.1년이라고 한다. 19세기가 되면 한 농가의 존속 기간이 21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 세대를 채 유지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농가가 한 세대를 지속하지 못하는데 그 사회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사실 이쯤 되면 아무리 자신이 있더라도 다시 자료와 분석 방법을 돌아보아야 했다. 생각해보라. 한 가정이 21년밖에 존속하지 못하는데 애들은 어디서 생기고 자라며, 애들이 자라지 못하거나 흩어지는데, 세금과 군역은 누가 지며, 문화는 어디서 창출되겠는가. 호적을 비롯한 당시 자료나 사회상에 아는 게 없는 나조차도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연구 결과였다.
호적에도 필요한 수만큼 올려
우선 이 연구는 자료 처리에 이상한 점이 있다. 조선 호적이 요즘 주민등록과 같아서 다른 군현으로 이주할 경우에는 호적에서 빠져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호의 구성원 한 사람이 죽거나 이사를 갈 때는 그 변동을 기재하고, 호 차원의 변동은 ‘추가된 호(加戶)’ ‘끊어진 호(絶戶)’으로 표시하여 나타냈다.(정해은 2002) 이 연구에서는 다른 고을로 이사해서 멀쩡히 살고 있을 경우도 ‘농가의 소멸’로 본 것이다.
치명적인 약점은 다른 데 있다. 호적의 호(戶)를 실제 농사짓는 자연호로 본 것이 그것이다. 호적대장이 요즘 인구 센서스처럼 해당 지역 내 모든 사람과 집을 다 조사하여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준에 따라 호를 ‘편제’하고 필요한 만큼 인원수를 조정하여 호적에 올렸다는 가정은 실제로 검증된 지 오래였다.(이수건 1976, 정진영 2003, 이유진 2021) 호적은 각종 부세를 수취하는 기초대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즉 호적은 각 군현에 요구되는 ‘호구 총액과 종류별 군역자 액수’를 고려하여 호를 차정하고 사람을 등재한 장부였다. 그래서 호당 구수나 호의 탈락, 존속률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조선 사회의 ‘이동, 유동’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할 여지를 던져주고 있다. 앞서 소개한 내 어릴 적 기억처럼 대체로 생활이 한 동네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 동네에서 대대로 삶이 유지되는 것도 아니었다.
대보름날 싸움을 하던 단위였던 ‘동네’가 생활의 터전이 된다. 예컨대 성환 대홍리 1구, 2구, 3구가 있는데, 베뽕재가 1구, 대정리가 2구, 내가 살던 홍경리가 3구였다. 이런 천안군-성환면-대홍리-홍경리(洞)의 행정체계는 1896년 이래 갖추어졌다. 그러니까 여기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자연 마을은 홍경리가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마을은 마을을 운영하는 공동 수입이 있고, 나라에서 부과하는 부세를 공동납부하며, 호적의 기초 자료를 작성하는 한편 그에 기초하여 부역을 제공하고, 농사를 비롯한 경제활동을 마을 회의를 통해 조정했고, 애경사를 함께 꾸려나갔다.(이용기 2007) 거제의 한 마을 사람들은 부역에 대한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합의하고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규정이 변동될 때마다 그 문서, 즉 완의(完議)를 다시 작성했다. 바닷가 마을의 경우 해세(海稅)로 마을에서 공동 채취하는 미역세(藿稅)를 공동 납부했다. 선세(船稅)와 어조세(漁條稅)는 소유주와 이용자가 납세했지만, 마을과 관련된 사안은 공동으로 해결했다.(전민영 2016)
마을 원로들이 주요 사항 결정
‘마을 사람들(洞中)’은 대개 원로와 몇 명이 모여 부세 납부 재원의 분배나 수합과 같은 일에 대해 결정하면 그것이 곧 ‘마을의 공의(公議)’가 되었다. 내가 못줄을 잡았던 그해에도 이장인 상석이 아버지, 원기 형 등 몇몇 동네 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 모내기 계획을 짰는데, 그것이 ‘마을 회의’다. 마을 수입은 전(錢)·벼(租)·쌀 등을 주민들에게 거두어 충당했다. 마을에서 필요한 공동노동, 즉 운력(運力 울격)을 동원하고, 참석하지 못하는 주민은 돈으로 납부했다. 동중에 별도로 마을계(洞契)가 조직되기도 했다.(김건태, 2021)
이런 마을 자치의 한편으로, 사람들의 이주와 이동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여기서 ‘상대적’이라는 말은 서양 봉건제의 장원(莊園)이나 일본 촌(村·무라)의 거주 이전과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호적에서 호구가 빠진 현상을 소멸이나 경제적 파산으로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일반 농민의 이동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이동은 먼저 가뭄이나 홍수로 인한 흉년과 기근 같은 자연재해가 큰 요인이었다. 국가 차원의 진휼이 발달한 이유이다. 농지의 개간, 매매, 소작지 변경도 이동의 이유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강력한 ‘공동체적 속박=규정’이 적었다는 것도 이동이 많았던 이유일 것이다. 영주의 불수불입권(不輸不入權·Immunity)에 입각한 유럽 장원(manor)이나, 촌법(村法)에 의해 운영되는 일본의 무라는 당초 거주 이전의 자유라는 게 없었다. 이동이 허용되는 공간의 크기가 ‘공납제 사회=국가’인 조선보다 좁았던 것이다. 농민뿐 아니라 양반도 지방관이나 사신과 같은 관직 이동이나 귀양살이와는 상관없는, 강릉에서 살다가 해주, 파주에서 살거나(율곡 이이), 부여에서 살다가 교하, 포천으로 이사했던 경우(백강 이경여) 등에서 보이는 거주지 변동 현상은 조선사회 고유의 역사상을 보여준다.
■ ‘거주 이전의 자유’가 헌법에 들어간 이유
「
유럽 봉건제는 공동체의 보호와 토지 긴박이라는 두 조건에 엮인 농노들의 노동에 기초하여 성립한 체제이다. 농사 대신 양을 치는 인클로저(Enclosure)로 인해 농노들은 토지에서 쫓겨나 방랑하게 되었다. 임금노동자가 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도시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 즉 ‘부랑자’를 단속하는 법이 생겼다. 부랑자란 ‘불량하다’는 뜻이 아니라, ‘정해진 거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浮浪者)’이란 뜻이다. 이 단계에서 ‘정해진 곳에 살아야 한다’는 정주법(定住法)이 생겼다.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정주법이 아니라, 도시 공업지역으로 인구가 유입될 수 있는 제도와 법이 필요하였다. 그중 하나가 19세기 구빈법(救貧法)이었고, 그 헌법적 반영이 1919년 바이마르 헌법에 등장한 ‘거주 이전의 자유’였다.
이렇게 보면 거주 이전의 자유를 추구해야 할 적극적인 자유로 보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전세가 오르거나 집값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이삿짐을 꾸려야 하는, 그것도 10년 사이에 수십 번을 이사했다는 사람들을 고려하면 ‘거주 이전’은 ‘자유’가 아니라 ‘방랑’이자 ‘방황’이 된다.
」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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