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왕관을 쓴 제왕
‘쵸비’ 정지훈은 오랜 시간 ‘무관의 제왕’으로 불려왔다. 다섯 차례의 결승전 진출, 다섯 번의 준우승이란 진기록이 그를 세간으로부터 옥새 없는 왕으로 평가받게 했다. 하지만 지난달 말 여섯 번째 결승 무대에 오르고, 처음으로 LCK 우승을 달성하면서 그는 그의 우승소감처럼 비로소 “무관과 무관”해졌다.
15일 서울 강남구의 젠지 사옥에서 정지훈을 만났다. 앞서 몇 차례 미드시즌이나 오프시즌에 그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지만, 우승 소감을 묻는 것은 신선했다. 그와 함께 지난 여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열리는 롤드컵에 임하는 각오를 들어봤다.
-첫 우승 후 약 3주가 지났다. 휴가는 어떻게 보냈나. 이제 우승했다는 실감이 나는지.
“우승 후 숙소에 일주일가량 머물렀던 게 후회된다. 할 게 없어서 게임만 했다. 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형과 같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형한테 피아노도 배웠다. 남는 시간엔 휴식을 취하고, ‘발로란트’나 ‘전략적 팀 전투(TFT)’ 같은 다른 게임도 즐겼다. 우승 직후엔 ‘우승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제 즐길 시간은 지났다. 앞으로 남은 것들이 더 중요하다.”
-젠지는 시즌 개막 전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한 팀으로부터만 우승 후보로 지목을 받았다. 당시 담원 기아나 T1보다 기대치가 낮았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팀 내부적으로는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나.
“스프링 시즌에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던 게 있다. 담원 기아는 ‘너구리’ 장하권 선수의 복귀로 기대를 모았고 T1은 스프링 시즌을 우승했으므로 두 팀에 비교해 경쟁력이 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즌 개막 전 스크림을 하면서 팀 내부적으로도 우리가 아주 강하단 생각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개막 후에 팀워크가 잘 맞기 시작하고, 좋은 성적이 나오니까 자신감이 붙었다. 스스로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엔 게임을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됐다. 설령 실수를 한 번 하더라도 그 때문에 게임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나. 다음 기회에 더 잘하면 된다는 마인드의 장착이 주효했다.”
-결승 준비가 아주 잘 됐다고 들었다. 정 선수는 언제 팀이 우승할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나.
“다른 팀원들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나는 우승 직전까지 갔다가 무너졌던 적이 많았으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끝까지 열심히 했다. 그 생각이 전부였다. 지금도 이렇게 잘하는데, 기량 유지를 넘어 발전을 이룬다면 반드시 우승할 것 같다고는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잘해도 우승을 못 한다면 그건 상대 팀이 자연재해 수준인 것이라 여겼다.(웃음)”
-결승전 사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다전제 활약과 관련해서 한 인터뷰가 화제가 됐다.
“내 다전제 활약상에 의문부호가 붙었던 건 2019년까지였다고 생각한다. 2020년부턴 다전제라는 이름값에 짓눌려서 가진 기량을 전부 못 보여드린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2019년엔 아쉬운 플레이를 많이 했다. 그땐 다전제 여부를 떠나서 게임을 못했다.”
-스프링 시즌 결승전 패배 이후에는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가 필요하단 의견도 나왔다.
“나는 선수에게 플레이 스타일이라는 게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LoL은 메타 변화가 잦다. 그 변화를 좇기 힘들게끔 스스로 족쇄를 차는 일이다. 상대가 분석했을 때 간파당하므로 좋지 않다. 메타마다 정답을 플레이하는 게 내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플레이 스타일을 정해놓고 플레이한 적은 없다. 원하지 않는 방향이다.”
-그렇지만 정 선수만의 특색은 어느 메타든 고유하다. 라인전에서 늘 우위를 점한다.
“어떻게 해야 라인전 구도를 편하게 가져갈 수 있는지 많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많이 돌린다. LoL에는 아주 많은 구도가 존재하고, 전부 직접 해보기엔 시간이 부족하므로 앞서 경험해봤던 비슷한 구도를 떠올리며 조금씩 변형을 해본다.
가령 이 구도에서는 ▲미니언이 스킬을 몇 번 맞아야 죽는다 ▲어느 타이밍부터는 스킬 한 번에 클리어가 된다 ▲상대의 아이템 트리는 대략 이렇다 등 변하지 않고 누적되는 데이터들이 있다. 변하는 것들도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활용하면 국면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다.”
-올해 미드라이너들은 아지르와 아리를 열심히 연습했다. 정 선수 역시 두 챔피언을 잘 다뤘다. 새로운 빌드나 아이템 트리 등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다른 선수들이 아리의 아이템 트리를 잘못 선택하고 있다”고 말해서 화제가 됐다.
“나는 아리의 쿨감신 효율이 좋다고 생각한다. ‘현혹의 구슬(Q)’의 두 번째 대미지가 고정 피해여서 마법 관통력 효율이 떨어지므로 (마관신을) 선호하지 않는다. 가격도 저렴하다. 아이템은 상대방의 것을 보고 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유연하지 못한 선택들이 보여서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아리로 밴시의 장막을 사는 것도 처음엔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시즌 후반엔 표준처럼 여겨졌다.
“밴시의 장막은 2600골드라는 가격에 비해 성능이 좋은 아이템이라 생각했다. 쿨감신을 선호해서 (강인함이 부족한데) 세주아니의 궁극기나 노틸러스의 ‘닻줄 견인(Q)’에 맞았을 때 역으로 폭사하는 상황도 막을 수 있었다. 아리는 싸움을 먼저 여는 챔피언이다 보니 플레이할 때 리스크가 크다. 밴시의 장막으로 리스크를 줄이고, 앞라인을 잡아서 리턴값을 높이는 방법이 좋다고 여겼다.”
-‘부서진 여왕의 왕관’ ‘내셔의 이빨’ 아지르도 화제가 됐다. ‘쵸비 전용’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아지르가 너프를 세게 당해서 앞으로 대회에 안 나오면 모두 솔직히 털어놓을 텐데 아직 (대회에) 나올 만해서 전부 얘기하긴 어렵다. 카메라를 꺼주시면 전부 말씀드릴 수 있다.(웃음) 부여왕 내셔 아이템 트리는 딜 로스가 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솔로 AP 조합이 아니라면 ‘그림자 불꽃’보다 내셔의 이빨이 좋다고 생각한다. 오브젝트 사냥이나 포탑 철거 속도도 빠르고, 한타 때 낼 수 있는 대미지도 말이 안 된다. 솔직히 이 아이템을 띄우는 과정이 어렵다는 게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서머 시즌 동안 아지르로 13승1패를 기록했다.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나.
“사람마다 강점이 다르지 않나. 누군가는 스킬 샷 정확도나 딜 교환이 강점이라면, 나는 거리 조절에 장점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지르의 모래 병사 위치 조절이나 라인전 딜 교환 메커니즘에서 이런 강점이 발휘돼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결승전에서 귀환하지 않고 양피지를 뽑아온 플레이를 놓고 여러 선수나 관계자들이 갑론을박을 벌였다. 정 선수가 이유를 설명한 개인 방송을 봤지만, 사실 이해 못 했다. 이 플레이가 화제가 된 것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 궁금하다.
“일반적으로 LoL 유저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아이템을 사면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아이템을 사서 강해졌는데, 상대가 싸워주지 않는 턴이 나온다. 그러면 귀환해서 아이템을 사오고 강해지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이 플레이와 관련해 의견이 분분해 ‘내가 틀린 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도 그 선택이 최선이었던 것 같다.”
-당시 아리에게 턴을 내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나.
“턴을 주지 않는다기보다는…당시에 ‘페이커’ 선수가 귀환 타이밍을 너무 잘 잡았다. 그래서 내가 귀환해버리면 픽의 의도가 퇴색되는 상황이었다. 아지르가 아리를 눌러놔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아리에게 시야 확보 턴을 허용할 것 같았다. 결국 ‘순간이동’ 맞교환이 이뤄지면 상대만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고 느껴 귀환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 구도에서는 아지르가 귀환하지 않아도 라인전을 할 만하다. ‘증폭의 고서’ 하나 사서 돌아오는 건 큰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3세트 땐 양피지를 뽑아놓고도 증폭의 고서만 사러 재차 귀환하기도 했는데.
“바이한테 갱킹을 당했다. 라인전을 하는 데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귀환했다가 철거를 한 번 내줬다.”
*이 갱킹은 ‘피넛’ 한왕호(신 짜오)의 탑 갱킹 리플레이 송출과 겹쳐 중계 화면에 잡히지 않았다. 정지훈은 미드라인 아래쪽 일자 부시 시야를 확보하러 들어갔다가 ‘오너’ 문현준(바이)에게 스킬 콤보를 맞았다. 순간 체력이 1309에서 853으로 깎였다. 그는 두 웨이브를 더 정리한 뒤 귀환했다.
-직후 롤드컵 선발전에서 바로 비슷한 플레이가 나오더라. 올해 롱소드 3포션 코르키를 비롯해 정 선수가 고안해낸 빌드가 미드라이너들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케이스가 몇 개 있었다. 빌드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선구자라는 건 독을 뿌려야 할 때도 있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다 따라해버리니까.(웃음) 만드는 사람으로선 기분이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열심히 고민해서 만든 빌드가 널리 퍼지면 기분이 좋은데, 내가 상대할 때 힘들어서 괴리감이 든다. ‘와, 이 빌드가 진짜 상대하긴 어렵구나’ 싶을 때가 있다.”
-정 선수가 스크림에서 처음 쓰고, 다른 선수가 실전에서 먼저 꺼낸 것들도 몇 개 있었다고 들었다.
“아마 ‘기민한 발놀림’ 아칼리를 내가 먼저 개발했던 것 같은데 중국 ‘LoL 프로 리그(LPL)’에서 더 먼저 실전 활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콩콩이’ 루시안도 아마 그럴 것이다. (콩콩이 루시안은 ‘쇼메이커’ 허수가 정 선수와의 스크림에서 경험해보고 먼저 썼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가 그렇게 말해줘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웃음)”
-오른을 포함한 탱커 챔피언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제 탱커를 선호하진 않는다. 대신 오른을 선호한다. 오른은 탱커인데 딜이 너무 세다. 미드라이너로 썼을 때 일반적인 미드라인 챔피언을 상대하기도 쉽다. 후반에 걸작 아이템에 대한 기댓값도 있다. 16레벨을 찍으면 궁극기 재사용 대기시간이 53초 내외로 줄어든다. 아마 오른으로 16레벨을 찍어본 분들이 많지 않아서 잘 모르고 계실 것이다.”
-‘킹겐 콤보’를 널리 유행시킨 ‘킹겐’ 황성훈은 정 선수의 매드 무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콤보를 고안해낸 것은 아니다. 가끔 칼바람 나락을 플레이하는데 나도 거기서 영감을 받았다. 한 오른 유저가 앞쪽에 눈덩이를 맞힌 뒤 궁극기를 쓰고, 눈덩이로 날아가서 남들보다 빠르게 궁극기 후속타를 쓰는 걸 봤다. 그걸 점멸로도 응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솔로 랭크에서 만난 다른 오른 유저의 플레이를 보고 응용한 것도 있다.”
-롤드컵에서 플라잉 오이스터, 100 씨브스와 같은 조가 됐다.
“어떤 조에 걸리든 좋은 플레이를 펼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룹 스테이지 대진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다른 팀들보다 편한 조에 속한 건 인정하지만, 롤드컵은 늘 ‘우리가 잘하는 게’ 중요하다. 메타 파악을 잘해야 한다. 다른 팀이 분석한 메타에 먹히지 않게끔. 이건 일종의 가위바위보 싸움이다.”
-메타는 패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라이브 버전인 12.17패치를 어떻게 평가하나.
“서머 시즌 결승전을 준비하는 동안 미드라이너로서는 아리·아지르·사일러스의 성능이 확실히 좋다고 생각했다. 셋 다 12.17패치로 너프를 당하지 않았나. 솔직히 이번엔 라이엇 게임즈가 너프를 합리적으로 했다고 느낀다. 셋 다 프로게이머들이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는 성능으로 바뀌었다. 밸런스가 잘 맞는다.”
-LPL 팀들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여겨진다. 4개 팀 중 어떤 팀이 가장 까다롭게 느껴지나.
“가장 최근에 우승한 JDG를 견제하고 있다. 하지만 작년에 롤드컵을 우승한 EDG도 경계가 된다. TES도 ‘나이트’ 줘 딩 선수가 잘하므로 나는 견제하고 있다. RNG도 4시드지만 충분히 잘하는 팀이다. LPL에서 하위권 팀이 상위권 팀을 잡는 모습을 종종 봤다. 순위와 관계없이 다들 잘한다고 느꼈다. 그래도 굳이 한 팀만 꼽으라면 JDG를 꼽겠다.”
-개인으로선 네 번째 롤드컵이다. 올해 대회가 정 선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올해 대회는 내 실력을 제대로 파악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롤드컵 땐 내가 너무 부족했다. 두 번째 대회는 막판에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세 번째 대회는 기적적으로 진출했다고 생각한다. 올해를 기회로 보고 있다. 젠지가 우승 후보로 꼽혀도 이상하지 않다고 자신한다.”
-끝으로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이번 롤드컵에선 정말로 잘하고 싶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내고 올 테니, 팬 여러분께서 많이 봐주셨으면 한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봐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게 팬 여러분이면 좋겠다. 열심히 하고 오겠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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