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상극인 후배와 축구하다 생긴 일 [언젠가 축구왕]

이지은 2022. 9. 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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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든 축구든 최선을 다하되 '순리대로' 하렵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이지은 기자]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나를 정의하자면 ESTJ다. 외향적이고 현실적이며 결과를 중시하는 계획적인 유형. 앞만 보고 달리는 데다가 무뚝뚝해서 후배들과 스킨십이 거의 없는 편이다. 밥 먹자고 제안 주지 않는 이상 먼저 약속을 잡을 줄도 모르고, 고민을 상담하는 후배의 말을 들어주기보다는 잘잘못을 따지거나 해결책만 건조하게 내밀기 일쑤다.

반려묘 잇몸에 문제가 생겨 마취 후 검사를 해야 한다는 후배 꿍언니의 걱정 앞에서도 비슷하게 반응했다. "마취하는 김에 스케일링도 해요. 전반적인 건강검진 싹 시켜달라고 해요." 첫 전신마취에 어깨에 잔뜩 긴장이 내려앉았던 꿍언니는 나를 향해 놀란 토끼눈을 뜨더니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가장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축구장에 따라온 편집자 후배

지난 번에는 전 직장 후배에게서 문자가 하나 왔다.

"선배와 함께 일하던 시간이 그리워요."

그 하소연에 그저 시답잖은 조언과 함께 기획 관련 링크만 하나 보냈다. 그랬더니 "제 한탄에 실질적인 도움을 즉각 보내다니 너무 선배답네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위로나 응원을 바랐던 게 아닌가 싶다. 문제를 받아 들면 빠르게 해결할 방법부터 찾는 성향인 내 딴에는 최선의 방안을 보냈던 것이고.

내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아무리 서로 좋은 관계였다고 해도 이미 그 시간은 지나갔고, 과거는 과거일 뿐 다시 그때로 돌아갈 일은 요원하니까. 그의 고민을 최소화시킬 만한 조언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던 것이다. 물론 그 친구에게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공
ⓒ 이지은
이런 강퍅한 나인데도 따르는 후배들이 몇 있다. 세봉은 그 가운데에서도 첫째가는 친구다. 얼마나 나를 따르냐 하면 내가 좋아서, 나와 함께하고 싶어서 축구를 시작했을 정도다. 점심을 나누며 요즘 축구에 빠졌다고 한껏 떠들어대는 나를 쫓아 구장까지 왔다. 덕분에 직장을 옮긴 지금도 주말마다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 세봉이 내게 MBTI를 물었다.

"선배의 MBTI 모든 알파벳이 저와 정반대인 거 아세요?"

INFP. 신중하고 직관적이며 감정이 풍부하고 융통성이 있는 타입. 사수와 부사수 관계였던 우리는 회사 안에서 곧잘 맞았다. 건조하게 팩트만 건네는 나를 그는 잘 견뎌주었고, 쉽게 감정이 올라갔다가 가라앉는 그를 나는 곧잘 진정시켰다. 일희일비하는 그에게 늘 "순리대로 하세요"라고 말을 건네곤 했고, 그러면 세봉의 마음은 금세 잦아들었다.

"순리대로 하라"는 말에 깔린 전제

문제는 그라운드에만 서면 내 돌파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미니 게임을 함께하던 날, 세봉과 내가 한 팀이 되었다. 10분짜리 경기에 믿을 건 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봉은 5분 만에 "악! 힘들어. 더는 못 뛰겠어요"라며 고장난 로봇처럼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나는 "이따가 쉬어요. 5분 뒤에 쉬면 되잖아"라며 주저앉으려는 그를 일으켜세웠고, 결국 10분을 오롯이 뛰게 만들었다.

시합이 끝나고 세봉은 서운함이 잔뜩 묻은 얼굴로 내게 "왜 선배는 회사에서는 '순리대로 하라'고 하면서 경기장에서는 '이따 쉬어. 5분 뒤에 쉬어'라고 해요?"라고 항변했다. 그에게 물었다.

"응? 다리 부러진 거 아니잖아. 쥐난 거 아니잖아."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반면 나로서는 그 하소연이 당황스러웠는데, 내 기준에 '순리대로 하라'와 '5분 뒤에 쉬라'는 다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리대로 하라'는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에 속상해하지 말라는 의미다.

신입이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쌓아도 이미 수 년, 수십 년 이 일을 해온 선배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냥 그 구멍들을 인정하고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역시 난 안 돼'라며 자포자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노력했다면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의 결과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에 가깝다.

열심히 했는데 안 되는 걸 어쩌겠는가. 그렇게 시행착오를 하나둘 쌓아올리다 보면 이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순리'에는 '최선의 노력'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경기 부수러 나갔다가 내가 부서졌다
ⓒ 이지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 담글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기에, 한번 닿은 물은 이미 저만치 흘러가버린다. 그러니 하나하나의 경험은 모두 처음이고,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경기도 마찬가지다. 몇 분만 지나면 결과를 무를 수 없어지고, 전광판 점수를 오롯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 무엇도 끝나지 않은 상황인데 중도에 멈추어버리면 이후 돌아오는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굳이 '이따 쉬라'며 후배의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세봉과 내가 다시 전처럼 회사 생활을 함께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적어도 그때처럼 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디렉팅해주는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배로서 세봉에게 조언해줄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순리대로 하라"는 말을 돌려줄 것 같다. 그 말 앞에 '최선을 다하되'라는 전제를 포함시켜서 말이다.

등 토닥이기는커녕 쓰러진 후배 팔을 잡아끌고 '이따 쉬라'고 말하는 선배라서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ESTJ가 건네는 최선의 다정인 것을.
 
 머리 곱게 넘기며 경기 참전하러 가는 뒷모습. 매일 깨지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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