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최후의 영웅인가·멸망 앞당긴 역적인가
[이준목 기자]
연개소문은 한국 고대사에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논쟁적 인물로 남아있다. 그는 당나라의 침입을 여러 차례 막아내며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모시던 군주를 시해하고 권력을 틀어쥔 독재자이자, 무능한 자식들에게 권력을 세습했다가 끝내 '고구려의 멸망을 초래한 원흉'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지난 13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연개소문은 어떻게 고구려를 멸망시켰나'라는 주제로 연개소문의 일대기를 통하여 고구려 역사와 동아시아 판도에 미친 영향력을 조명했다.
당 태종은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군이자 불패의 명장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생전에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 바로 고구려 정벌이었다. 당 태종은 649년, 임종을 앞두고 자국도 아닌 고구려와 관련된 유언을 남겼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요동에 가는 일을 중지하라'는 당태종의 유언은 고구려 정벌을 중단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태종은 생전에 요동을 넘어 기세등등하게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다가 참담한 패전을 경험했고, 그에게 평생 없는 최대의 좌절과 트라우마를 안겨준 라이벌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기 최대의 권신이자 유능한 장군이기도 했다. 연개소문의 집안은 조부와 부친이 고구려의 최고관직인 대대로와 막리지(현재의 국무총리)를 역임했을만큼 최대의 귀족 가문이었다. 이러한 명문가의 촉망받는 후계자였던 연개소문은 오늘로 말하면 금수저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가문의 권세를 이어가는 것은 처음부터 쉽지만은 않았다. 고구려의 다른 귀족 세력들이 연개소문이 선대의 관직을 세습하는데 반대하고 나선 것.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마땅히 그 지위를 계승하려고 했지만 국인(고구려의 주요 귀족세력)들은 연개소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하였으므로 그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젊은 나이에도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판이 보통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연개소문 가문에 권력이 몰리는 것을 경계했던 고구려 귀족사회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당시 고구려의 국왕인 영류왕 역시 연개소문을 극도로 경계했다. 가문의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이 강했던 연개소문은, 본심을 감추고 다른 귀족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면서 한동안 낮은 자세를 취했고, 이후에야 겨우 관직에 오를수 있었다.
642년 10월, 오랫동안 칼을 갈아온 연개소문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다. 수도 평양성에서 열병식 도중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집권세력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약 100명에 이르는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학살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한 것도 모자라, '왕의 시신을 잘라 여러토막으로 내고 도랑에 버렸다'라는 잔혹한 행위까지 저지른 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보장왕을 허수아비 국왕으로 세우고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다. 당시 7세기 고구려 밖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수나라 뒤를 이은 통일제국 당나라가 등장하여 위세를 넓혀가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당시 신라의 실권자였던 김춘추(훗날의 태종무열왕)는 사신으로 고구려를 깜짝 방문하여 연개소문을 만난다. 김춘추의 목적은 같이 동맹을 맺어 백제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춘추의 제의에 연개소문은 '죽령(현재의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의 고개)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신라가 만일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연개소문의 목적은 아직 내부 지지세력이 많지 않아 불안한 상황에서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그 기반으로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한강 상류의 요충지였던 죽령을 내달라는 것은 신라로서는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김춘추는 '대왕께서는 이웃과 친선하는데는 뜻이 없으시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줄 것만 요구하신다. 신은 죽을 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라며 단호하게 반박했다. 연개소문은 사신인 김춘추를 감금하여 인질로 삼아버린다. 김춘추는 얼마 후 간신히 신라로 탈출했지만, 단 한번의 협상으로 신라를 적으로 돌려버린 연개소문의 외교적 실책은 그의 사후에 고구려의 운명을 바꾼 엄청난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한편 당나라는 드디어 고구려를 침략할 것을 선언한다. 당 제국을 중심으로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던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의 명분으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와 대신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을 문제삼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본인도 쿠데타로 형과 아버지를 몰아내고 황제가 됐으면서 연개소문을 비난한 것이다.
645년 4월, 당태종은 선전포고 후 1년만에 약 20만에 이르는 대군을 직접 지휘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후 수십년에 걸쳐 이어질 본격적인 '여당전쟁'의 시작이다. 강력한 당군은 고구려 최전선 요새인 요동성을 함락하며 기세를 높였고 수도인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당군은 수도로 가는 길목인 안시성에서 뜻밖의 발목을 잡힌다. 645년 6월 20일, 안시성에 도착한 당군은 당대 최신식의 장거리 무기이자 공성병기인 포차를 활용하고 대군을 투입했으나, 끝내 이 작은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안시성은 험준한 산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했고 흙과 돌을 쌓아 만들어서 더욱 견고했다.
일방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한 당군은, 8천여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두달에 걸쳐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안시성보다 높은 높이의 토산을 이용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공성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토산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연결된 안시성 성벽 일부도 같이 무너지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고구려군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토산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양군은 3일간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고구려군이 토산까지 점령하며 결국 당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한계에 봉착하자 당태종은 645년 9월 18일, 결국 전군에 퇴각을 지시한다. 천하제일의 명장이라고 불리던 당태종이 비참한 패배 이후 쫓기듯이 돌아가야 했고, 그의 평생을 통틀어 이 정도의 패배를 안긴 경험은 고구려가 유일했다.
여당전쟁의 승리는 쿠데타 이후 지지기반이 불안정했던 연개소문의 권위를 높여주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여당전쟁을 총괄하여 승리로 이끈 연개소문은, 기존 3년 임기였던 대대로 대신 '태대대로(太大對盧)'라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 무기한 종신직을 보장받았다.
막강한 권세를 거머쥔 연개소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권력 세습까지 추진한다. 연개소문은 세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에게 주요한 관직을 내리고 고구려 조정은 연씨 일가가 장악하게 된다. 특히 장남인 연남생은 18세의 나이에 중리대형(왕의 비서실장)와 대장군 등 요직을 거치며 일찌감치 연개소문의 공식 후계자로 부상한다.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린 연개소문은 왜 직접 왕이 되려고는 하지 않았을까. 고대사회의 특성상, 고구려 왕실에 이렇다 할 흠결이 없는 상황에서 오랜 역사를 이어온 왕조를 교체한다는 것은, 천하의 연개소문에게도 명분이 없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는 고려시대의 무신정권이 여러 국왕을 밥먹듯이 교체하면서도 끝내 왕위에 오르지 않는 이유와도 유사하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손을 잡고 유학국가 건설을 추진하며 고려를 멸망시켰던 조선과는 달리, 군사적 능력과는 별개로 그저 '권신'에 가까웠던 연개소문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국가 이념이나 철학이 없었기에, 왕을 앞세우고 실권을 장악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여전히 고구려 정벌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호시탐탐 설욕을 노리던 당태종에게 신라의 김춘추가 찾아온다.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당나라와 신라는 나당연합(羅唐聯合軍)을 결성하고 고구려을 양면으로 압박하는 상황이 된다. 외교적 실책으로 신라를 적으로 돌려버린 연개소문 정권에게는 전례없는 큰 위기였다.
하지만 649년, 당태종이 돌연 사망하면서 나당연합의 고구려 침공계획은 일시 중지된다. 희대의 정복군주였던 당태종도 끝내 고구려를 넘지 못한 것은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그 뒤를 이은 당고종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한동안 고구려를 침공하지 않고 기회를 엿봤다.
660년, 연개소문과 고구려에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백제가 나당연합의 공격으로 멸망한 것이다. 고구려의 우방으로 남쪽에서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주던 백제의 멸망은 이제 고구려가 사방이 적에게 포위되었던 것을 의미했다. 더구나 당나라는 백제 정벌의 경험을 토대로 더 이상 육로만이 아니라 바닷길을 통해서도 고구려를 침공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가지게 됐다.
661년 당나라는 다시 한번 고구려를 침공하여 2차 여당전쟁이 벌어진다. 당군은 평양성과 압록강, 두 갈래로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갔고 신라군도 지원을 약속했다. 연개소문은 전투경험이 없는 아들 연남생에게 3만의 대군을 주어 당군을 막게했지만, 고구려군은 압록강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연남생은 군대를 다 잃고 혼자만 도주하여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8월에 당나라군은 파죽지세로 수도 평양성까지 육박해왔다. 연개소문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평양성 방어에 나섰다. 연개소문은 수성을 바탕으로 장기전을 시도했고, 고구려의 혹독한 겨울과 마주하게된 당군은 추위와 보급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신라군의 지원도 백제의 잔존세력 때문에 무산됐다.
당군이 지친 틈을 타 총반격에 나선 연개소문은 사수에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모두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두는 데 성공하며, 2차 여당전쟁도 고구려의 승리로 끝난다. 평양성 전투는 살수대첩, 안시성전투와 더불어 한국사에서 중국 왕조와 전쟁으로 거둔 최대의 승리중 하나로 꼽힌다.
무력으로 고구려 정복이 어렵다고 느낀 당나라의 태도는 달라진다. 당나라는 최대의 종교행사였던 태산봉선(泰山封禪)에 적국이었던 고구려를 초대하기도 했다. 당나라는 동아시아 패권국으로서의 명분을 얻었고, 고구려도 계속 피해가 큰 전쟁을 강행할 수는 없었기에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고자하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또다시 고구려를 뒤흔든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20여년간 고구려를 철권통치했던 권력자 연개소문이 사망한 것. 연개소문은 세 아들에게 '형제가 고기와 물같이 사이좋게 지내고 권력을 다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의 사후 다가올 고구려의 불행한 운명을 직감했던 것은 아닐까. 안타깝게도 연개소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장남인 연남생이 연개소문 사후 권력을 승계했지만 무능했던 그는 아버지처럼 국정을 장악하고 이끌어나갈 카리스마가 없었다. 권력은 혈육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격언처럼, 원래 사이가 좋았던 삼형제는 연개소문 사후 주변의 이간질에 휩쓸리며 서로를 의심하게 되면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연남생이 수도를 비운 틈을 타 연남건과 연남산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도망자 신세가 된 연남생의 선택은 충격적이게도 당나라로 투항한 것이었다. 고구려 내부의 혼란을 놓치지 않은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동생들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먼 연남생은 당군의 길잡이가 되었다. 당나라는 연남생이 바친 성을 주둔지기로 활용하고 연남생이 바친 정보를 활용하여 고구려의 방어망을 무력화시키고 파죽지세로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했다.
668년 8월, 수도가 포위된 고구려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당나라에 항복하여 700여년에 걸친 고구려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나라 밖의 적은 물리쳤으나 나라 안의 문제로 무너져버린 강대국 고구려의 허망한 최후였다. 배신의 대가로 연남생은 죽을 때까지 당나라의 상류층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며 여생을 보냈다.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고구려 멸망의 비극은 연개소문의 어긋난 권력욕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가 집권하지 않았어도 시대 상황상 당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는 분석도 있고, 최소한 연개소문 생전에는 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여당전쟁을 수차례 승리로 이끈 공로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명분없는 쿠데타로 인한 정통성의 부재, 외교적 실책들은 장기적으로 국력을 소모시키고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여 고구려가 갈수록 고립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더구나 능력이나 국익보다 무능한 아들들을 끝까지 중용하여 가문의 권세를 이어가는 데만 집착한 모습은, 권신으로서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비록 본인은 유능했을지 몰라도 개인과 가문이 모든 권력을 장악-세습하면서 결국 국가멸망의 씨앗까지 초래한 연개소문과 고구려의 비극은, 다양성의 통합과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건강한 사회'의 중요성을 되돌아보게하는 반면교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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