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청와대를 고작 미술관으로 바꾼다고?(3)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7월 청와대를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본관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영빈관은 근현대 미술품 전시장으로 재구성하며, 녹지원 등 야외 공간은 조각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했다. 말이 복합문화공간이지 미술관으로 바꾼다는 얘기였다.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 등을 참고해 마련한 안이라고 강조했다. 언론에는 ‘비어 있는 청와대, 베르사유 궁전처럼 꾸민다’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베르사유 궁전이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긴 한가. 청와대의 역사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인 나는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한국의 이우환, 프랑스의 장미셸 오토니엘 등 세계적 미술가들이 베르사유 궁전의 야외 정원에 설치 작품을 ‘풍경처럼’ 전시한 사실은 전해 들었다. 궁전 내부는 어땠을까. 최근 독일 중부 헤센주의 소도시 카셀에서 열리는 세계적 미술제전인 제15회 카셀도쿠멘타를 보러 유럽에 갈 일이 있었다. 내친김에 파리를 여행지에 추가하며 베르사유 궁전도 가봤다.
파리에서 기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은 사냥광이었던 루이 13세가 사냥 캠프를 지은 게 건축 역사의 시초였다. 그 아들 루이 14세는 프랑스 왕의 전통적 궁전인 루브르 대신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하며 건물을 증축했다. 루이 15세, 16세를 거치며 더욱 우아해진 베르사유 궁전은 1789년 프랑스혁명 발발과 함께 시민혁명군에 점령되면서 궁전으로서의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
원형대로 보존한 침대와 소파, 샹들리에 등 가구와 장식품은 ‘태양왕’ 루이 14세와 후손의 화려한 왕실 문화를 들여다보는 관람의 깊이를 더해줬다. 회화도 무수히 걸려 있긴 했다. 하지만 왕과 왕비, 공주, 귀족들의 초상화와 왕위 계승 전쟁, 예술 후원 등 당대 사회를 보여주는 등 역사적 자료로서의 미술품이었다. 다섯 살에 왕위에 올라 섭정 시기를 거쳐야 했던 루이 14세의 유년기를 보여주는 회화, 바로크 조각의 거장 베르니니가 조각한 청년 루이 14세 조각상이 그러했다. 왕가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 여인들의 초상화가 있는 방은 야사를 보는 재미까지 줬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댄 채 그림 한 점, 가구 하나를 살피며 구경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곳은 베르사유 궁전의 탄생과 몰락을 통해 프랑스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 공간으로 재활용되고 있었다. 물론 궁전 안에서도 일본의 무라카미 다카시, 미국의 제프 쿤스 등 미술계 스타들의 전시가 열린 사실을 구글 이미지를 통해 확인했다. 어디까지나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서 조각 작품을 방 한가운데 두는 정도였다.
문체부가 청와대를 베르사유 궁전처럼 만든다는 건 한국의 근현대사를 대통령실을 통해 보여주는 기념 공간으로 만든다는 목표에 다름 아니다. 방향성은 이렇게 잘 잡아놓고도 미술관으로 바꾸는 엉뚱한 방향으로 노를 저어가니 황당하다.
주객이 전도된 이유를 곱씹어봤다. 너무 성급했다. 문체부는 청와대가 국민에게 개방된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활용 방안을 발표했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다. 이승만부터 문재인까지 12명의 대통령이 거쳐 간 청와대 활용 방안을 마련하는 업무의 엄중함을 생각하면 과속할 일이 아니다. 당연히 미술계뿐 아니라 건축과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는 논의의 장은 없었다.
문체부는 청와대를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에 내년 예산 445억원을 배정했다. 내부 시설을 뜯어고치기 시작하면 되돌리기가 어렵다. 속도를 늦추고 재고하기 바란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에게는 베르사유 궁전을 국가박물관으로 선포한 루이 필립 왕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가 주어졌다. 오명을 남기지 않았으면 싶다. 장관부터 베르사유 궁전을 가보길 권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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