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고르바초프와 김정은
지난 8월 30일 사망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역사를 바꾸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냉전이 종식되었다. 그가 이 결과를 의도하진 않았지만 평화를 지키려는 그의 신념이 이룬 업적임은 분명하다. 덕분에 세상은 더욱 자유롭고 안전한 곳이 되었다. 김정은은 어떤가. 한반도를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고 있는가. 북한 주민에게 밝은 미래를 가져다주고 있는가. 지금까지는 부정적이다. 근본 이유는 핵에 대한 그의 집착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지켜줄 것 같은 핵이 오히려 그와 북한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북한은 소련 붕괴 원인을 열심히 연구했다고 한다. 1985년에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재건)로 경제를 살리려 했다. 당시 소련은 극심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주민은 식료품을 사기 위해 하루 평균 3시간을 국영상점 앞의 긴 줄에서 기다려야 했다. 경제성장은 멈추었고 생산성은 마이너스 상태였으며 커지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증발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고르바초프는 그 이유를 KGB 등 기득권 집단의 반발에서 찾았다. 그는 이들의 저항을 극복하고자 투명성, 소통, 법치를 강조하는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밀어붙였고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북한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글라스노스트가 국가 통제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그 결과 체제가 붕괴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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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를 지킨 고르바초프 신념과
김정은의 핵 집착은 상반되지만
핵 지키려다 위기 부르는 북한은
체제 살리려다 망한 소련과 닮아
」
김정은은 고르바초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시장 활동을 묵인하고 경제 분권화는 도입하면서 정치적 개방은 거부했다. 더 나아가 공포정치와 빈번한 숙청으로 경제 분권화에 따를 수 있는 체제 이완을 막으려 했다. 이런 방식의 강압적 통치가 오랫동안 지속되긴 어렵겠지만 단기적 효과는 거둘 수 있었다. 집권 후 몇 년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그는 정치 권력의 공고화에 성공했다. 경제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북한경제는 연평균 2∼3% 성장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소련 붕괴의 근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이 누적되면 사회주의를 버려야만 경제가 살아나는 임계점에 도달한다. 1980년대 소련이 그랬다. 이때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처럼 느리더라도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도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를 개보수하려고만 했다. 김정은도 2018년까지 나름대로 실용적인 정책을 폈지만 개혁의 루비콘강을 건너지는 않았다. 사회주의에서도 정책만 잘 만들면 자본주의에 버금가는 경제발전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헛된 희망이다. 결국 경제를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버려야 하고 사회주의를 지키려면 경제를 잃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30년 전에 직면한 딜레마다. 김정은도 같은 곤경에 처해 있다.
고르바초프와 김정은의 공통점은 또 있다. 고르바초프가 사회주의를 지키려고 추진했던 정책이 소련 붕괴를 촉진했듯이 안보를 위한다는 핵이 북한을 오히려 궁지로 몰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인의 과도한 음주 때문에 성장률이 떨어졌다고 판단했다. 주류 소비를 줄이기 위해 거국적인 반(反) 알코올 캠페인을 벌인 결과 공식통계에서는 술 판매량이 절반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비밀로 분류됐던 가계지출 통계에 따르면 같은 기간 설탕 소비량은 두 배로 증가했다. 밀주 소비와 판매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었던 주세가 줄어 재정적자는 더욱 커졌다. 경제의 복잡성을 알지 못한 채 지식이 얕은 지도자가 내놓은 상식 수준의 정책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김정은의 핵 집착은 고르바초프의 실패한 정책보다 치명적이다. 그는 한동안 경제는 분권화하면서 정치적 통제력을 강화해 통치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나 핵 개발은 이 균형을 와해시켰다. 그는 제재에 맞서 자력갱생을 내세우며 경제활동을 통제하고 있다. 또 경제위기가 체제 위기로 파급될 가능성을 두려워해 사상투쟁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경제는 수렁에 빠진다. 먹고 살기가 훨씬 힘들어졌는데도 정치적으로 억압만 하는 체제를 주민이 좋아할 리 없다. 결국 체제는 불안정해진다. 이처럼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 핵이 오히려 체제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북한은 최근 핵 무력을 법제화했다. 위기의 원인을 위기의 해결사로 간주한 거대한 착각이다.
절대 권력자의 근시안적 집착은 위기의 기폭제다. 이런 사회에서는 통계도, 전문성도 중요하지 않다. 권력자의 수준이 정책 수준이 된다. 최근 발굴된 자료에 따르면 경제가 극심한 위기에 빠졌다는 보고가 여러 번 올라갔지만 고르바초프는 결단을 미루었다, 김정은은 어떨까. 아마 그런 보고조차 올릴 수 없지 않을까. 통계도 권력자가 원하는 대로 가공되어 있지 않을까. 역사는 장기적으로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북한 주민은 무엇을 원할까. 권력자가 보검이라 선전하는 핵이 오히려 주민을 찌르는 창이 되었음을 알아 가고 있지 않을까.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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