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인생사, 꿈속의 꿈이로다

2022. 9. 1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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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가을 하늘이 환하게 드러났다. 서울 하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랗고 맑은 공기다. 눈을 감고 어깨를 뒤로 젖혀 호흡을 깊게 해보았다. ‘맑은 공기라도 폐에 집어넣어 욕망에 물든 탁한 기운을 내보내야지.’ 아, 오늘 같은 날에는 바람처럼 건너가 어느 맑고 기품 있는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다.

명절을 어찌 보낸 것인지 몸이 찌뿌둥하다. 그래도 달 보며 고향 생각도 하고,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 모습도 그려보았다. 사실 출가자에게 명절은 있으나마나 할 정도로 시답잖다. 아니, 오히려 챙길 것이 많아 솔직히 귀찮다고 해야겠다. 그나마 낙이라면, 차 한 잔 앞에 두고 가득 찬 가을 달 감상하는 정도랄까. 어려서는 그리도 기다리던 명절이었는데 말이다.

「 무지개 같은 허상 좇는 게 인생
맑고 밝은 지혜의 빛은 어디에
내 안에 있는 감로수 찾아보자

생각해보니 어려선 학교만 갔다 오면 나가 놀았다. 허약해서 친구들 노는 걸 주로 구경했다. 그래도 설레며 좋아했던 게 있는데, 바로 무지개 떴을 때 친구들과 함께 무지개를 좇아 산 너머까지 달려가는 거였다. “무지개가 있는 저곳까지 가보고 싶어.” 친구와 함께 무지개가 사라질까 숨이 턱에 받치도록 뛰었다. 하염없이 달리는 사이 무지개가 사라지면, 터벅터벅 되돌아오며 미친 듯 뛰어간 것을 후회하곤 했다.

이처럼 나는 허망한 것을 좋아했다.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좇아 뛰었고,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입을 닫았다.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 사라지는 거 구경하다 학교에 늦을 때도 있었고, 은빛 강물에 비친 달이 아름다워 친구와 함께 강둑에서 긴 시간을 보내다 부모님께 혼이 났다.

그래서인가. 커서는 또 다른 허무한 것들을 좇아 퍽 헤매었다. 머리만 깎으면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줄 알았지만 허사였다. 출가한 후에도 허상에 빠져 ‘중 벼슬 닭 벼슬만도 못하다’는데, 이름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세상에 허무하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만, 허망한 것들은 죄다 아름다워서 마음이 현혹되기 쉬웠고, 잡힐 듯 멀어지면 절망하다가도 다시금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일어나 설쳤다. 그러다 생각했다. ‘허상을 좇을 일이 아니라, 내 안의 감로수를 찾아야겠구나.’

최근에 TV에서 우연히 ‘환혼’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혼을 바꾼다는 설정 하에 전개되는 러브 스토리다. 그런데 궁금해졌다. 저 남주인공은 몸의 주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새로 깃든 혼을 사랑하는 것일까. 마치 무문관 35칙 ‘천녀이혼(倩女離魂)’ 화두처럼, 병든 몸으로 누워있던 천녀가 진짜인지, 혼이 분리된 이후의 천녀가 진짜인지 묻는 것처럼 헷갈렸다.

『장자』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장주(莊周)가 어느 날, 나비가 되어 꽃 사이를 나는 꿈을 꾸었다. 잠을 깬 장주는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미 답을 제시했다. 절대경지에서 보면 꿈도 현실도 구분이 없다는 것을.

불교는 인생을 헛된 꿈에 비유한다. 사랑하는 이와 맺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몸부림치던 조신도 한생을 다 살았으나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진짜 같던 꿈도 깨지 않았을 땐 괴로운 삶이었다. 꿈이 너무 생생하여 가위에 눌리기도, 울다 지쳐 깨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모든 것들은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이와 같이 관하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고 가르친다.

한편 ‘큰 꿈을 과연 누가 먼저 깨울 것인가(大夢誰先覺)’라고 읊었던 『삼국지』의 제갈량은 ‘평생의 일을 내 스스로 알고 있다(平生我自知)’고 했다. 대몽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줄 이미 알았지만, 그럼에도 유비의 삼고초려에 뜻을 함께한 것이다. 마치 저 『금강경』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구절처럼, 무상한 줄 알면서도 마음을 내어 살아냈다는 뜻 아니겠는가.

헛된 꿈을 좇아 달려가던 나도 이제는 인생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 잘 안다. 또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감히 예상이 된다. 하지만 ‘비록 하늘과 땅은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낳고, 비록 해와 달은 오래되었지만 날마다 그 빛은 새롭다’던 연암의 말처럼, 헛된 꿈인 줄 알면서도 다시 마음을 내어 오늘을 살고자 한다. 강렬한 이기적 욕구에 시달리면서도 생명의 향기 풍기며 맑고 밝은 지혜의 빛을 향해 한 걸음씩 걸음을 내디뎌 볼까 한다.

원영 스님·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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