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성품교육의 핵심은 '신앙'.. 신앙 빠지면 도덕교육에 머물러

2022. 9. 1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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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학습을 떠나기 전 기도하는 광성드림학교 학생들. 광성드림학교 제공.


성품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하는 행동으로 알 수 있다. 아이들이 부모의 감시 때문에 말을 듣는다면 이것은 아이들의 성품이라고 할 수 없다. 부모가 없을 때도 게임이나 노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자신들이 해야 될 일을 열심히 한다면 이것이 아이들의 진정한 성품이다. 우리 부모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사회생활을 하거나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 곳에서 보여야 되는 모습이 있다. 때로는 미소를 짓기도 하고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 수 없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루를 보내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성품이며 이런 시간들이 쌓여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실패한다. 그래서 열심히 살지 못하고 죄를 많이 지었다고 후회하면서 나는 실패한 인생, 쓸모없는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런 생각이 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불가능이 없고 항상 역전과 반전이 있다. 또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잿더미와 냄새나는 거름더미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신앙이다. 우리의 실패가 아무리 크고 부끄러워도 언제든지 회복이 가능한 것이 신앙이 가진 힘이다. 하나님에게 돌아온 인간의 마음, 하나님을 새롭게 믿는 인간의 마음에는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막9:23).

이러한 신앙이 성품교육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품교육을 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저 도덕교육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성품교육의 목표도 자아를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앙 없이 하는 성품교육은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세상이 주는 염려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신앙이 없으면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성품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신앙이 모든 것이며 지지치 않는 힘의 근원이다. 인생을 살다가 힘들 때도,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안 좋을 때도, 원치 않은 일에 휘말려 몹시 난감할 때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당할 때도,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도,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아 눈앞이 캄캄할 때도, 신앙은 언제나 새 힘을 주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능력자 중의 능력자이다. 그러므로 성품교육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오는 좌절과 낙망, 안 된다는 생각, 인내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신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신앙의 역할이 이토록 중요한데도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성품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성격 그대로이고 여전히 참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며 죄를 반복해서 짓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신앙에는 의식적인 차원과 무의식적인 차원이 있다. 의식적인 차원은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까? 신앙에는 또 하나 무의식적인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인지적인, 의식적인 차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차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많은 불신앙의 요소가 들어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이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그래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계속 염려가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신뢰하지 못하는 부분이 신앙의 무의식적인 차원이다.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생각이 실제로 믿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믿어야 된다는 생각은 있지만 실제로는 믿지 못하는 부분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믿음이 인지보다는 정서나 신념 같은 비 인지적인 것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인지가 아닌 정서에 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것이 신앙의 의식적인 부분이다.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좋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어린 아이가 왜 엄마를 신뢰할까? 엄마와의 관계에서 좋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왜 그럴까? 엄마가 어떤 분인지 잘 모르거나 엄마와의 관계에서 좋지 않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경험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여부를 결정한다.

생활비가 부족해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험이 계속 쌓이면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이 생긴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렴풋하게 알아도 생활비 부족이 계속되면 하나님에 대한 감정이 몹시 상하게 된다. 이외에도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좋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무의식에 있는 저장 창고에 하나하나 쌓이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들어가 쌓이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도 못 믿게 된다. 성경 말씀 자체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공중을 나는 새에게도 먹을 것을 주시고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비춰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신앙인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하나님이 나를 먹여주신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먹여주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있지만 그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이 ‘나를 과연 먹여주실까?’라는 의구심이 있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나를 먹여주신다는 말씀이 인지적인 부분이라면 ‘그 하나님이 나를 정말 먹여주실까?’는 정서적인 느낌이다. 바로 이 무의식적인 느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한다. 이와 같이 믿음은 인지가 아닌 정서로 결정된다. 인지가 믿음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인간의 무의식에 깊이 저장된 하나님에 대한 경험, 신앙생활에 대한 신념 등이 하나님을 신뢰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성경에서 예를 들어보자.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매우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1,4)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다윗의 무의식에는 불신앙적인 요소보다는 신앙적인 요소가 더 많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사울을 보자.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려진 것이 없지만 사울의 우울증과 불안, 변덕스러운 마음을 볼 때 사울의 무의식에 많은 불신앙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울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신앙을 가지게 해서 성품교육을 힘 있게 진행하려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무의식 세계를 말씀과 기도로 깨끗하게 정화해야 한다. 말씀이 주로 의식에 작용한다면 기도는 무의식에 작용한다. 하나님에게 응답받지 못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상처는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억눌린 채로 무의식에 저장된다. 그러나 이제 깨달음이 생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말씀과 “내가 너에게 더 좋은 것을 주려고 그때 응답을 안 해준 거야.”라는 내면의 음성, 성령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래도 말끔하지는 않다. 이것은 의식 세계의 일이지 무의식 세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한다. 정말 꺼내기 싫었던 그 아픔을 다시 꺼내서 기도한다. 또 내가 뭔지도 몰랐던 그 슬픔을 놓고 기도한다. 그러면 기도는 내 의식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 효과는 내 무의식에서 열매를 맺는다. 기도는 정서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정서적인 아픔이 숨어있는 무의식 세계에 들어가서 역사한다. 이렇게 되면 무의식에 숨어있는 많은 불신앙적인 요소가 제거된다. 알게 모르게 나를 괴롭혔던 무의식 세계가 정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 세계의 정화가 없으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 수 없고 성품교육에 큰 장애물이 된다. 온전한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그 신앙을 가로막는 무의식적인 불신앙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성품교육을 할 때도 이 부분이 중요하다. 학생들을 인지적으로만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학생들의 무의식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펴 그것을 의식의 차원으로 드러내서 고칠 수 있어야 한다. 또 기도회를 통해 성령께서 학생들의 무의식을 깨끗하게 정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한다. 성령이 하시는 일중에 하나가 인간에게 인지적인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지만 또 하나는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정화시켜주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직신학자인 루이스 벌코프는 성화의 많은 부분이 무의식에서 일어나며 이 부분은 인간이 손을 대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무의식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이 절실하며 이 일을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우리의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치료받는 시간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고 맺힌 것을 풀어주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해주 목사
필자 이해주 박사는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그룹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와 기독교교육학 박사를 취득했다. 석사논문은 ‘청소년의 성품교육을 위한 교육과정 개발’로 박사논문은 ‘기독가정에서 부모의 양육태도가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성품교육 전문가’이다. 현재는 씨앗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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