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과몰입 공화국
대한민국은 과몰입 공화국이다. 낚시든 마라톤이든 골프든 취미생활을 해도 미친 듯이 하는 나라다. ‘컴퓨터 오락’이었던 인터넷 게임에 빠져 방송으로 실황 중계까지 하면서 스포츠로 만들었다. 과몰입은 강력한 팬덤으로 이어진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일반인 인플루언서도 팬덤을 갖고 있다. 덕분에 선진국이 되면 투표율이 낮아지고 정치에 무관심해진다는 상식을 깼다. 정치에 너무 관심이 많아 과몰입을 걱정해야 하는 유일한 선진국이 아닐까 싶다.
명절에 모처럼 만난 가족이나 친구와도 정치 이야기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동창회나 동호회에서도 그렇다. 사람마다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그걸 용납하지 못한다. 혐오 증오 분노 같은 감정이 관용 이해 배려 같은 것들을 뒤덮어 버린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나는 솔로’ ‘환승연애’처럼 일반인이 등장하는 리얼리티 연예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악의적 공격에 시달린다. TV로 보는 남의 연애사에 몰입하는 것까진 이해한다고 쳐도 개인 SNS까지 찾아가 욕하고 협박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
일반인이 이 정도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은 말할 것도 없다. 팬덤에 속한 게 대단한 권리라도 되는 양 사생활을 침해하고 사사건건 간섭한다. 팬덤도 아닌데 특정인을 좌표처럼 찍어 스토킹하듯 악성 댓글을 집요하게 다는 이도 많다. 수사기관에 고소·고발해 처벌받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소환조사를 해보면 대부분 평범한 직장인이나 주부, 학생인데 나름의 이유로 미운털이 박힌 이들을 공격하는 걸 ‘정의감’으로 포장한다고 한다.
불의한 일에 분노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불의라고 생각하는 일을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정명석 변호사 대사처럼 ‘워 워’가 필요하다. 내가 아는 정보와 가족이나 친구가 아는 정보가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 세상에 산다. 듣고 싶은 뉴스만 듣고 보고 싶은 뉴스만 볼 수 있다. 뉴스와 정보 편식의 위험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처럼 명명백백한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나’ 분노부터 해선 안 된다. 내가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한국인의 과몰입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영향만은 아니다. 한국은 서구 선진국과 달리 근대화 과정에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덜 받았다. 농촌공동체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나와 타인의 거리가 모호하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가족관계부터 고향, 학력까지 신상정보를 꼬치꼬치 묻는 거라고 한다. 한국인은 참견하고 훈수 두는 것도 좋아한다. 오락거리가 변변치 않던 시절 길거리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 금세 구경꾼이 둘러쌌는데 결정적 순간에 훈수를 두는 바람에 대판 싸움이 붙곤 한 것도 그 단면이다. 긍정적으로는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관심과 도움의 손길로 나타나지만 부정적으로는 지나친 참견과 간섭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나아가 타인의 생각과 취향까지 좌지우지하려 한다면 과몰입이다.
더구나 한국인은 열정의 사람들이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을 때는 온 국민이 줄기세포 전문가가 됐다. 박세리가 골프로 이름을 떨칠 땐 기본 룰도 모르는 국민들도 골프 전문가가 됐고 김연아가 세계무대를 주름잡을 땐 어려운 피겨스케이팅 용어를 줄줄 외웠다. ‘너는 중간이 없어’라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열정이 전후의 폐허를 딛고 짧은 시간 선진국을 만드는 동력이었다.
한국인의 강한 공동체 의식과 열정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만난 긍정적 결과물이 관심과 참여라면, 부정적 결과물은 과몰입 현상이다. 합법적이고 건전하다면 뭔가에 몰입하는 건 정신건강에 좋다.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참여와 관심도 민주주의의 성숙에 필수요소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거나 가족관계나 우정에 금이 갈 정도라면, 스스로 감정 조절이 되지 않고 강박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게 된다면 과몰입이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과몰입이 의심된다면 최선의 해법은 대상과 거리두기다. 특히 정치적 목적이나 이권을 위해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과몰입을 방조하고 부추기는 이들을 멀리해야 한다.
송세영 편집국 부국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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