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경제·전략적 위상 높아진 아세안과 윈-윈 관계 만들어야
세계의 성장 엔진이 된 동남아
이제 동남아는 거대한 해외 투자가 몰려들고 있는 세계 경제의 생산기지이자 성장 엔진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지정학적·지경학적 우위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전략적 요충으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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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세안을 우리 편으로…” 미·중·일 등 대규모 경제·안보 지원 경쟁
한국과의 관계도 갈수록 중요해져…중국에 이은 제2의 무역 상대
한류 영향력에도 아직 경제이익만 챙기는 상인국가 이미지 강해
정부개발원조 늘리며 지역 안정·번영 함께하는 파트너 역할 해야
」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태국·미얀마·말레이시아·캄보디아·싱가포르·라오스·브루나이 등 10개국으로 구성된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은 1967년 창설돼 올해로 55주년을 맞았다. 인구 6억7000만 명, 전체 GDP 3조6462억 달러(약 5040조, 세계 GDP의 3.5%)에 이른다.
아세안은 다양한 정치 체제와 경제 수준, 종교, 문화를 가진 회원국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적으로는 내정 불간섭과 만장일치제를 통해 충돌을 피하고 화합을 도모하며, 경제적으로는 역내 자유무역협정(FTA)를 통해 경제 통합을 추구한다. 역외 경제 강국들과도 FTA를 맺는 등 개방적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이 지역 성장 촉진을 위해 노력해 왔다.
미국식 민주주의 확산 정책 한계
또 한국·미국·중국·인도·러시아·일본·호주·유럽연합(EU) 등과 협력 관계를 맺고 연례 아세안 정상회의 때 주요국 정상들을 초청해 관계 강화를 추구하고 정상외교 무대를 제공한다. 아직 군사적·경제적으로 약소 지역이지만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아세안이 과거와 같이 강대국 무력 충돌의 희생양이 되는 걸 예방하고, 강대국으로부터 지원과 협력을 최대한 끌어내며, 국제무대에서 존재감과 위상을 고양하기 위한 생존 전략의 산물이다.
아세안은 무엇보다 미·중 경쟁이 역내 정세 불안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관계 균형을 추구해 나가고 있다. 특히 아세안이 불완전한 민주주의 또는 권위주의 국가로 구성된 점을 고려하면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확산 정책이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자산으로 활용되기 어렵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필리핀과 동맹을 맺고, 태국·싱가포르 등에 군사기지를 두는 등 동남아 지역에서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유지해왔으나,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환태평양경제파트너십(TPP)에 가입하지 않는 등 이 지역과의 경제적 파트너십 확대를 등한히 했다. 그러나 미·중 간 경제 경쟁의 중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미국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창안하는 등 인도·태평양과 동남아에서 중국의 압도적 존재감을 상쇄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대규모 투자 등을 통한 동남아와의 경제 관계 증대, 그리고 풍부한 개발협력 자금을 활용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 등으로 영향력을 강화해 왔다. 일본은 과거 중상주의적 경제 행태 등으로 아세안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군사대국이 되지 않으며 아세안과 마음이 통하는 상호 신뢰 관계와 대등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하고 동남아를 배려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싱가포르 국책 연구소 ISEAS가 올해 아세안 국민을 대상으로 강대국에 관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일본은 54.2%의 신뢰를 얻어 미국(52.8%), 중국(26.8%)을 앞섰다.
동남아서 갈수록 영향력 커지는 중국
중국은 경제력·군사력 강화를 토대로 세계로 뻗어가는 교두보라 할 수 있는 동남아에서 엄청난 기세로 세력 증대에 힘을 쏟고 있다. 국제중재재판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남중국해 9단선이 중국 영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남중국해 도서에 활주로·미사일 등 군사 시설을 건설하는 등 미국의 역내 군사적 우위에 도전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14억 명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활용하여 동남아의 대중국 무역의존도를 높이고, 일대일로 전략으로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등에 인프라를 건설하고 제조업 진출 등을 통해 역내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아세안 무역의 20%를 차지하며 아세안에 압도적 최대 무역 상대국이자 일본에 이은 제2의 투자국이 됐다. ISEAS이 아세안 국민을 대상으로 아세안에 대해 영향력이 있는 나라를 조사한 결과, 경제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응답이 76.7%를 차지했다. 이는 미국의 9.8%를 압도한다. 정치전략적으로도 중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응답이 54.4%에 달해 미국(29.7%)의 거의 두 배 수준이었다.
한국은 동남아와의 무역과 투자, 인프라 등에 적극 진출하면서 아세안 국가들과 경제적 파트너십을 증대시켜 왔다. 한국에 아세안은 미국·EU 다음으로 3대 해외 투자 지역이고, 중국에 이어 최대 무역 상대이다. 지난 정부는 아세안·인도와의 협력과 교류 증진을 추구하는 신남방정책을 통해 동남아 외교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외교부에 아세안국을 신설하고 동남아 공관 규모 확대를 통해 아세안 외교 증진을 위한 체제도 보강하고 한·아세안 정상회의(2019년 부산)도 개최했다.
동남아 학생 유치 위한 장학금 늘려야
아세안과의 경제 관계 증대뿐 아니라 한류의 폭발적인 확산으로 한국의 인지도와 호감도가 크게 증대되었다. ISEAS 조사에서 동남아 국민 8.5%가 가장 가고 싶은 나라로 한국을 꼽아 일본(22.8%)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미국은 8.4% 중국은 7.2%였다.
다만 한국의 동남아 정책은 가시적 국익을 우선하는 경제 관계 강화에 역점이 주어져 왔기 때문에 역내 질서 변화에 현명하게 대응하면서 아세안과의 윈-윈을 추구하는 전략적 접근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한국은 동남아에서 경제적 이익만 취한다는 상인 국가 이미지에서 벗어나 지역 안정과 번영에도 기여하는 책임 있는 파트너로서 신뢰와 존경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첫째, 국제 공헌도 평가의 주요 기준인 정부개발원조(ODA) 규모를 선진국에 걸맞은 수준으로 증액해 아세안에 더 많은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전체 개발협력(ODA) 자금의 28%를 동남아에 투입하지만, 한국 ODA 규모는 일본의 6분의 1 수준이다. 또 현지 진출 한국 기업이 고용 창출에 적극 나서고, 기술 이전이나 아세안 기업의 부품 사용 비율을 높여 달라는 요구에 보다 긍정적으로 대응해야 할 시점에 왔다.
장학금을 대폭 늘려 우수한 동남아 학생들이 중국·일본보다 한국을 선호하도록 하는 장려책을 펼 필요도 있다. ISEAS 조사에서 동남아 학생들의 해외 유학 대학 선호도는 한국이 2%로, 미국(25.6%)·일본(9.6%)은 물론, 중국(8.8%)에도 뒤졌다. 다문화가정이 한국에서 제도적·문화적 차별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아세안 국민의 호감과 신뢰를 얻고, 한국의 저출산 문제 개선에 도움을 준다. 한류로 대표 되는 소프트 파워가 동남아에 대한 일방적 문화 침투라는 반발을 사지 않도록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미·일 등과 창의적 공조체제 필요
둘째, 미국·일본·호주·EU 등 민주주의 국가 그룹과 아세안에 공동 진출할 수 있는 분야를 발굴해 역내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창의적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이 일본·호주와 마찬가지로 군사·안보에서 동남아로 한·미 동맹을 확장하는 것은 우리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쉽지 않다. 따라서 한국은 IPEF에 명시된 공급망·인프라·청정에너지·탈탄소 등의 분야에서 정책적으로 미·일 정부·기업 간 협력을 강화해 이 지역에 공동 진출하는 방향을 적극 검토해 볼만 하다. 또 ODA나 방산 등 경제안보적 의미가 큰 전략 분야에서 미·일·호주 등과 공동 대응하는 전략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쿼드나 인도태평양전략 등 군사적 성격을 지닌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는 점을 보완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아세안 대부분의 국가가 중·저소득국임을 고려할 때 미·일 등 서방 진영과 중국 중 동남아와 더 밀접한 경제 관계를 유지하는 쪽이 더 큰 역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중국과 아세안과의 경제 관계가 이대로 계속 심화하면 중국의 존재감과 목소리는 커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일·호주 등 서방 진영이 보다 적극적인 경제적 관여를 통해 아세안의 경제 발전에 공헌하고 중국과 역내 경제적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이 지역 평화와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한국이 동남아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서방 선진국들과 힘을 합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에 성공한 한국의 성취를 드러낼 수 있어 의미가 깊다.
이혁 전 베트남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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