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뜻밖의 여왕
지난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숨을 거둔 곳은 스코틀랜드의 밸모럴성. 2007년 개봉한 영화 ‘더 퀸’도 이곳을 주요 배경으로 삼는다. 때는 1997년 여름,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비극적 사고로 숨진 직후다. 여왕 일가는 밸모럴성에서 휴가를 보내다 사고 소식을 듣는데, 국민적 추모 열기와 딴판으로 처음에는 애도의 뜻조차 발표하지 않아 여론의 거센 비판에 직면한다.
영화는 여왕의 내면을 영지에 불쑥 나타난 아름다운 사슴 한 마리에 눈길을 주는 모습을 통해 인상적으로 그려내는데, 개인적으로 더 인상적인 건 여왕이 운전하는 장면이었다. 특히 개울을 건너다 차가 멈추자, 이내 문제를 파악하고 “전쟁 때 기계를 다뤄봐서” 안다고 자신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여왕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복무한 세대란 걸 그제야 비로소 실감했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더 크라운’(2016~)에서도 상세히 그려진 대로, 여왕은 날 때부터 왕위에 오를 운명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 조지 6세가 왕이 된 것은,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유명한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 때문에 즉위 1년 만에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 ‘킹스 스피치’(2011)는 조지 6세(콜린 퍼스)가 이처럼 뜻하지 않게 왕위를 계승한 과정과 함께 독일과의 전쟁을, 중요한 대국민 연설을 앞두고 말 더듬는 습관을 고치려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영화에도 “왕이 얼마나 불안한 직업인지”를 비롯해 왕실의 존립에 대한 왕의 고민을 담은 대사가 등장한다.
‘더 퀸’은 왕실에 대한 당시의 실제 비판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도 한편으로 토니 블레어(마이클 쉰)를 통해 균형을 잡는다. 극 중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막 총리가 된 블레어는 왕실의 고루한 분위기에 답답해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왕실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말에 버럭 화를 낸다. 이런 블레어를 통해 영화는 50년 넘게 군주로서 왕실을 지켜온 여왕에 대해, 블레어의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로 전쟁을 겪은 세대에 대해 존중을 드러낸다.
열 번째 총리였던 블레어를 포함해 윈스턴 처칠부터 가장 최근의 리즈 트러스까지, 여왕은 자신이 임명한 총리가 열댓 번쯤 바뀌는 동안 내내 한자리를 지켰다. 1926년생이니 동시대 한국인이라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모두 겪은 터. 이런 군주는 다시 나오기 힘들지 싶다. 전란의 세월을 포함해 무려 70년을 재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고비용의 입헌군주제가 21세기에도 계속될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왕실이 없는 나라에서도 왕실 영화는 계속 환영받을 공산이 크다. 미국 아카데미상은 ‘더 퀸’에 여우주연상을, ‘킹스 스피치’는 남우주연상과 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을 안겼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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