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도 못 찾는 이상한 '아파트 작명법'
한때 인터넷 게시판에 화제가 된 글이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택시를 탔는데 아파트 이름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아 “기사양반 니미XX 아파트로 가주시오”했더니, 택시기사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호반리젠시빌 아파트’로 데려다 줬다는 글이었습니다.
이미 수 년전에 돌았던 글인데 잊을만하면 또다시 인터넷 게시판에 등장하죠.
사실 2003년에 준공된 전남 나주 대호동 ‘호반리젠시빌 아파트’는 최근의 아파트 작명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이름도 아닙니다.
아파트 재건축은 워낙 절차도 까다롭고 사업성 등을 꼼꼼히 따지다보니 준공까지 최소 10~15년이 걸립니다. 때문에 입주민들은 최고로 좋은 이름을 붙이고 싶은 욕심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 지역적 특색도 붙여야 하고, 건설사가 컨소시엄을 통해 지은 아파트일 경우 각 건설사의 브랜드명도 포함시켜야하다보니 이름은 점점 더 요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건설사의 브랜드명이 아파트값을 좌우하기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현재 아파트 가운데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아파트는 뭘까요. 바로 광주에 있는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 1차’입니다. 이름만 25자입니다. 대방건설이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빛가람 마을에 지은 아파트란 것까지는 알겠는데 ‘엘리움’은 뭐고, ‘로얄 카운티’는 뭘까요. ‘엘리움’은 대방산업개발의 아파트 브랜드명입니다. 로얄 카운티는, 말 그대로 ‘왕실이 있는 자치주’라는 뜻이겠죠.
귀한 재건축, 이름도 ‘외래어’로 길~게
긴 아파트이름으로는 경기 화성시에 있는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여기는 2개의 회사가 컨소시엄으로 지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월드메르디앙’은 월드건설산업에서 짓는 아파트에 붙이는 브랜드고, ‘반도유보라’는 반도건설의 브랜드입니다. 즉 월드건설산업과 반도건설이 컨소시엄으로 동탄시범다은마을에 지은 아파트란 말입니다.
워낙 아파트 이름이 길고 어려워지다보니 ‘아파트 작명법’을 정리한 글도 한때 화제가 됐었습니다. 똑똑한 네티즌들은 외국어 범벅으로 만든 아파트 이름의 특징도 잘 잡아냅니다.
우선 근처에 아무 것도 없으면 아파트명에 무엇을 붙일까요. ‘더 퍼스트’입니다. 뭐 유일하다는 의미를 좋게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근처에 4차선 이상의 도로가 있으면 ‘센트럴’을 붙입니다. 강이나 호수가 있으면 아파트명에 ‘리버’ ‘레이크’를 붙입니다. 공원이 있으면 ‘파크’ ‘파크뷰’, 산이 있으면 ‘포레’가 따라붙죠. 학군지나 학원가에 위치하면 ‘에듀’가 붙습니다. 혹자들은 “에듀가 붙은 아파트가 제일 비싸다”는 우스갯소리도 합니다.
한글보다는 외국어가 ‘조어(造語)’를 하기 편하다보니 한글 브랜드를 갖고 있던 건설사들도 브랜드명을 외래어로 바꿨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한화건설이죠. 한화건설은 ‘꿈에그린’을 버리고 ‘포레나’로 브랜드명을 교체했습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아무래도 ‘꿈에그린’으로는 주민들이 원하는 외래어범벅 아파트명을 조합하기가 쉽지 않으니 바꾼 게 아니겠느냐”고 해석했습니다.
포레나(FORENA)는 스웨덴어로 ‘연결’ ‘맞잡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공간의 연결을 통해 새로운 주거문화를 만들어나갔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합니다. 혹 한화건설이 스웨덴쪽에 사업진출을 했는지 물어보니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도 외국어 브랜드명을 갖고 있었음에도 ‘하이엔드 브랜드(고급브랜드)’를 추구하며 새 브랜드를 론칭하는 곳도 많습니다.
‘더 샵’으로 유명한 포스코건설은 지난 7월 하이엔드 프리미엄 브랜드 ‘오티에르(HAUTERRE)’를 론칭했습니다. 오티에르는 프랑스어로 ‘높은’ ‘귀한’ ‘고급스러운’ 을 뜻하는 ‘오트(HAUTE)’에 ‘땅’ ‘영역’ ‘대지’를 뜻하는 ‘테르(TERRE)’를 결합한 단어로, 포스코건설은 고귀한 사람들이 사는 특별한 곳이라는 의미로 이 브랜드를 내놨습니다. 영어로는 부족하니 스웨덴어, 프랑스어까지 가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산스크리트어도 조만간 등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건설도 강남의 고급단지를 중심으로 ‘디 에이치(THE H)’를 붙이고 있습니다. 2023년 11월 준공예정인 강남 개포동 ‘개포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구 주공1단지)’에도 디 에이치가 들어갑니다. 한때 둔촌주공재건축조합이 시공사업단인 현대건설에 ‘우리도 강남 THE H급으로 시공해달라’는 공문을 보내 논란이 된 적도 있습니다. DL이앤씨의 ‘아크로’, 대우건설의 ‘써밋’, 롯데건설의 ’르엘‘ 등이 하이엔드 브랜드입니다.
건설사 ‘하이엔드 브랜드’ 론칭까지…“복잡해”
건설사가 ‘하이엔드 브랜드’를 론칭하면 웃지못할 일들도 종종 발생합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집값상승기에 맞춰 단지명을 영어이름으로 바꾸면서 각 건설사의 하이엔드브랜드를 쓰겠다고 요청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하이엔드 브랜드는 지역, 마감재, 내장제 등을 고려해 아주 제한적으로만 쓸 수 있는데 막무가내로 쓰겠다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 골치아팠던 적이 있었다”면서 “우리는 어느정도 정리가 됐는데 최근 ‘오티에르’를 론칭한 포스코 건설도 아마 비슷한 홍역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습니다.
물론 꿋꿋하게 한글이름을 고집하는 건설사도 있죠. 대표적인 곳이 부영주택입니다. 1983년부터 주택건설업과 주택임대업을 해온 부영주택은 여전히 모든 아파트에 ‘사랑으로부영’을 붙입니다. 부영주택은 전국 33개 단지에 26만 가구 이상의 주택을 건설했는데 각 아파트마다 전부‘사랑으로부영’이 들어갑니다. 원앙 두 마리도 함께요.
부영건설쪽에 왜 ‘사랑으로’를 고집하는지 물어봤더니 회장님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온갖 외래어 범벅으로 변해버린 아파트들 속에서 그래도 정겨운 이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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