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윤필용 사건' 때 강제전역 된 황모 전 대령 사건 파기환송.. 소멸시효 기산점 달리 봐

최석진 2022. 9. 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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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유죄판결 없는 강제구금' 손배청구에 장애 없었다는 하급심 뒤집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은 불법행위 요건사실을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한 날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고 강제 전역을 당한 전 육군 대령과 가족들이 44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기각한 2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파기됐다.

7일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1973년 '윤필용 사건' 당시 윤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의 고문·폭행 등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전역지원서를 작성했던 황모씨와 황씨의 아내, 딸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앞서 1심과 2심은 법원의 판단을 거치지 않은 채 불법구금됐다가 석방된 경우 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한 경우와 달리 전역처분의 무효가 확정되기 전이라도 손해배상 청구에 장애가 있었다고 볼 수 없어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고가 전역처분무효확인소송을 통해 전역처분과 관련해 이뤄진 고문, 폭행 등 가혹행위 사실의 확인과 전역처분이 무효라는 승소판결이 확정되기 전에는 같은 사유를 주장하면서 국가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는 사정을 인식하기 어려웠다고 봐야 한다"며 "전역처분무효확인소송의 승소판결이 확정됐을 때 비로소 가혹행위 및 전역처분으로 인한 국가배상청구권의 단기 소멸시효가 기산된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윤필용 사건'은 1973년 4월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소장)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윤 사령관 등 군인 10여명이 쿠데타 모의 등 혐의로 구속되고 30여명이 전역당한 사건이다.

이 일로 윤 전 소장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돼 옥살이를 하다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그와 가까운 장교들도 대거 군복을 벗고 쫓겨났다.

당시 육군 3사단에서 인사참모(대령)로 근무하고 있던 황씨는 이 사건에 연루돼 육군 보안부대에서 '윤 전 소장으로부터 받은 지령이 무엇이냐'고 추궁받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 구타 등에 시달렸다. 그는 '예편원을 쓰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말에 전역지원서를 썼고, 당시 국방부장관은 원에 의한 전역(희망전역)을 명했다. 전역처분을 받을 무렵에는 다시 불법 체포돼 고문과 폭행을 당하고 금품수수사실을 허위자백하기도 했다.

40여년이 지난 뒤 '윤필용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 승소하자 황씨도 2016년 "의사결정의 자유가 박탈된 상태에서 전역지원서를 작성한 만큼 전역 처분은 무효"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내 이듬해 승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뒤 황씨와 황씨의 아내, 딸은 "국가 소속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로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라며 국가를 상대로 각각 3억원, 1억원, 4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황씨 등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한 황씨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시효가 완성돼 소멸됐는지와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항변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권리남용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먼저 재판부는 "당시 보안사 수사관들의 황씨에 대한 가혹행위는 수사라는 직무집행의 외관을 갖춰 행해진 고의의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라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고는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 따라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재판부는 국가배상책임이 발생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정부 측 항변을 받아들였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혹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소멸시효가 완성돼 소멸하는데, 황씨 등은 국가의 불법행위가 종료된지 44년 만에 소송을 냈으니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한 것.

정부의 '소멸시효 완성' 항변에 대해 황씨 측은 '윤필용 사건'으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던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아 국가의 불법행위가 드러난 이후, 자신에 대한 전역처분의 무효를 확인하는 행정소송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황씨 측은 '윤필용 사건'의 다른 피해자들은 모두 국가배상을 받았고, 국가 권력에 의한 기본권 박탈로 발생한 손해를 배샹해야 할 사회적 필요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의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국가에게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유만으로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며 배척했다.

특히 재판부는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과 관련 "국가기관이 수사 과정에서 한 위법행위 등으로 수집한 증거 등에 기초해 공소가 제기되고 유죄 확정판결까지 받았으나 재심사유의 존재 사실이 뒤늦게 밝혀짐에 따라 재심절차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된 후 국가기관의 위법행위 등을 원인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재심절차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채권자가 손해배상청구를 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볼 것이다. 하지만 원고는 법원의 판단을 거치지 않은 채 불법구금됐다가 석방됐던 것이므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윤필용 사건의 다른 피해자들과 같이 재심절차를 통해서만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라며 황씨 등의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은 "민법 제766조 1항(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이란 불법행위의 요건사실에 대한 인식으로서 위법한 가해행위의 존재, 손해의 발생 및 가해행위와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 등이 있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도 구체적으로 인식한 날을 의미하고, 이를 원인으로 손해배상을 소로써 청구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안 날을 의미하며, 그 판단은 개별 사건의 여러 객관적 사정을 참작하고 손해배상청구가 사실상 가능하게 된 상황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재판부는 "원고가 작성한 전역지원서에 기초해 이뤄진 전역처분이 외관상 존재했으므로, 전역처분무효확인소송을 통해 전역처분과 관련해 이뤄진 고문, 폭행 등 가혹행위 사실의 확인과 전역처분이 무효라는 승소판결이 확정되기 전에는 원고들이 같은 사유를 주장하면서 국가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는 사정을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의 전역처분무효확인소송의 승소판결이 확정됐을 때 비로소 전역처분과 관련해 이뤄진 가혹행위 및 무효인 전역처분이라는 불법행위의 요건사실을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인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가혹행위 및 전역처분으로 인한 국가배상청구권의 단기 소멸시효는 그때부터 기산된다"고 판시했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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