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의 시시각각] 정권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해법

예영준 2022. 9. 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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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현금화 판결않고 떠난
김재형 대법관 퇴임사에 담긴 의미
시간 번만큼 이젠 '천천히 서두르라'
예영준 논설위원

지난 2일로 임기를 끝낸 김재형 전 대법관의 행보를 마지막 순간까지 숨죽여가며 지켜본 건 한국뿐 아니라 일본 정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는 강제징용 피해자(원고)의 신청에 따라 압류된 미쓰비시중공업(피고) 국내 자산에 대한 현금화(강제매각)를 미결 서랍에 남겨둔 채 대법원을 떠났다. 강제매각이 법원에 의해 확정되고 집행되는 것을 일본은 최후의 레드라인이라고 경고해 왔다. 그 결정을 보류하고 후임 재판부가 판단할 때까지 시간이 생긴 셈이다.

김재형 대법관이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같은 날, 박진 외교부 장관이 광주에 내려가 구순을 넘긴 강제징용 피해자 두 분을 만났다. 어제는 강제징용 해법에 관한 의견 수렴을 위해 조직된 민관협의체가 마지막 4차 회의를 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만 두 차례 ‘빠르게’란 말을 언급했다. 8·15 경축사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빠르게 한·일 관계를 복원하겠다”고 한 것이다. 박 장관이 광주에 가던 날, 김성한 대통령실 안보실장은 한·일 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쯤 되면 정부가 어떤 스케줄을 그리고 있는지 윤곽이 잡힌다. 그런데 현금화 문제에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를 얻은 지금도 ‘빠르게’만이 능사인지는 고민해 볼 일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2일 광주를 찾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를 만나 손을 맞잡고 있다. 뉴스1

판결로만 말하는 게 미덕인 법관도 뭔가를 말해야 할 때가 있다. 김 전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정치·입법의 영역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안인데도 법원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다. 모든 문제를 사법부가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당장 국민의힘 비대위 사태를 말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지만, 강제징용 문제도 염두에 둔 발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국민의힘 가처분과 달리 강제징용 사건이 처음부터 법정으로 가지 말았어야 할 사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형사적 징벌이든, 민사적 배상 의무든 사법부의 판결로 최종 심판이 내려지는 것을 정의의 실현이라 보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한다. 2018년의 대법원 판결은 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사법의 영역이었지만 판결 이후엔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발생했다. 지난 4년간 봤듯이 판결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외국 기업이 순순히 배상금을 낼 리 없다. 강제매각이 또 다른 이행 방법이지만, 그러기엔 외교적 관계에 미칠 반대급부가 너무 크다. 결국 남는 것은 원고와 피고, 또 양국 정부의 입장을 절충해 법 테두리 내에서 판결과 모순되지 않는 정치적 해법을 찾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사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김 전 대법관의 뜻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해결에 의지가 없었던 문재인 정권과 달리 윤 대통령은 ‘주권 문제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받을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밝혔다. 재원은 한국의 재단이나 기금이 충당하고 일본은 징용 문제에 대해 상응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여기에도 많은 난관이 있다. 일본 기업의 채무를 대신 이행함에 따라 발생하는 구상권(求償權)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일본 정부 혹은 기업이 과연 징용 문제에 대한 사죄를 할지 등의 문제들이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국내 정치적 과정이다. 2015년 위안부 합의가 정권이 바뀌자 사실상 백지화된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 이번만큼은 국민 다수가 동의하고 야당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 설득과 동의는 두말할 나위 없다. 만일 그게 안 되면 피해자들은 또다시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고, 일본은 이를 문제삼아 외교적 해결을 늦출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뒤집히지 않을 해법을 만들고, 일본과의 협상에서도 최선을 다해 국민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그러자면 행동은 ‘빠르게’ 하면서도 사고는 빈틈이 없어야 한다.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가 윤 대통령에게도 절실한 시점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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