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 마라톤' 최연소 성공..남극 '쩍' 소리가 바꾼 그 청년 운명 [별★터뷰]

심석용 2022. 9. 5.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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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봉사연합 회원들은 지난 7월 16일 인천 강화 볼음도를 찾아 해양쓰레기 수거 작업을 했다. 사진 윤승철

지난 7월 16일 오전 10시쯤 인천 강화군 볼음도 선착장. 여객선이 램프를 내리자 푸른색 조끼를 입은 남녀 20여 명이 섬으로 내려섰다. 목장갑을 끼고 집게와 포대 뭉치를 든 이들은 갈색 모자의 리더를 따라 북동부 해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4시간 뒤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왔을 땐 양손엔 한껏 두툼해진 포대가 들려있었다. 포대 안은 우유 팩, 캔, 폐그물 등 각종 쓰레기로 가득했다. 등에 걸친 푸른색 조끼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갈색 모자를 벗어든 리더 윤승철(33)씨는 “볼음도 해변 곳곳에 널브러진 해양 쓰레기를 주웠다”며 “배 시간에 맞추느라 샅샅이 돌아보지 못했는데도 포대 80개가 모자랄 만큼 쓰레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날 외딴 섬에서 해양 쓰레기 수거에 나선 이들은 윤 대표가 이끄는 섬마을봉사연합(IVU) 회원들이다. 4년간 ‘바다 청소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윤씨를 지난 1일 만났다.


사고로 포기한 꿈, 다시 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활동가를 꿈꿨다. 그러나 2003년 중학생 때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발가락부터 허벅지까지 깁스했고 목발을 짚어야 걸을 수 있었다. 성장판을 다치면서 반년 가까이 병원 신세를 졌다. “언제 다시 뛸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다”는 의료진의 얘기에 그는 ‘달리기는커녕 5㎞ 이상 걷기도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의에 빠진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대학교 신입생 시절 문예창작학과 과제였던 소설 집필이었다. 당시 윤씨는 고민 끝에 소설 속 주인공을 ‘잘 달리는 사람’으로 설정했다. 자신의 소망을 글로나마 이루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자료 조사를 하던 중 극지 마라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극지 마라톤은 미국의 오지 레이스 전문 기획사인 ‘레이싱 더 플래닛’(Racing The Planet)이 주관하는 대회다. 참가자들이 식량·취침 장비·옷 등을 짊어지고 6박 7일 동안 총 250㎞를 달린다. “언젠가 내가 극지를 달리는 주인공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 그는 자신이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피나는 노력이 시작됐다. 재활 치료를 재개했고 매일 2㎞를 달리고 5㎞를 걷고 뛰길 반복했다. 반년 뒤 충분히 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해병대에 입대했다. 22개월을 버티다 보니 거뜬히 10㎞를 달릴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문제는 4000만원 가까이 되는 참가 비용이었다. 극지 마라톤은 이집트 사하라 사막, 중국 고비사막, 칠레 아타카마사막, 남극을 모두 달려야 ‘그랜드슬램’으로 인정한다. 휴학한 뒤 자취방 보증금을 빼고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4곳을 완주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2011년 윤씨는 동생과 함께 사하라사막 마라톤에 출전했다. 사진 윤승철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지원해달라는 제안서를 기업들에 보냈고 소셜펀딩을 시작했다. ‘대학생 윤승철, 꿈을 안고 사막과 남극을 달립니다’란 프로젝트였다. ‘잊고 싶은 물건을 보내주시면 사막 한복판에 묻어서 잊고 싶은 기억을 완전히 잊히게 해드리겠다’,‘후원자 수만큼 나무를 심겠다’ 등 이색 공약을 내세웠는데 반응이 좋았다. 소셜펀딩이 흥행하고 기업 후원이 이어지면서 참가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윤씨는 2012년 12월 3일 ‘세계 최연소’ 극지 마라톤 그랜드 슬래머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날 남극의 기억에 섬으로 향했다


윤씨는 2012년 남극마라톤에 도전했다. 사진 윤승철
하지만 윤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남극에서 텐트를 치던 어느 날 밤,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를 들은 기억 때문이었다. 10~15초 간격으로 굉음을 내며 부서지는 빙하를 보며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의 기억은 윤씨를 활동가의 길로 이끌었다. 생태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한편 ‘무인도 섬테마연구소’란 벤처 사업을 시작했다.
섬마을 봉사연합은 지난 6월 충남 당진 대난지도로 해양쓰레기 수거활동을 갔다. 왼쪽부터 섬마을봉사연합의 윤승철씨, 한의사 김승규씨, 사진작가 홍종호, 이준호씨. 사진 윤승철

현장에 서니 ‘지구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해양 쓰레기로 신음하는 섬이 많았다. 2018년 친분이 있던 사진작가·한의사 등과 함께 섬마을봉사연합을 만들었다. 회원을 모집해 매달 셋째 주 토요일, 배를 타고 섬으로 향했다. 지자체 등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해변 곳곳을 다니며 쓰레기를 주웠다. 사진·의료 봉사도 병행하다 보니 “또 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섬 주민과의 관계도 돈독해졌다고 한다.

윤승철씨가 2019년 11월 경남 통영 학림도에서 해양 쓰레기를 줍기 전 참가자들에게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 윤승철

섬마을봉사연합은 정기 회원 120여명이 활동하는 단체가 됐다. 4년간 다녀온 전국의 섬은 21곳, 총 800여명이 봉사에 참여했다. 지난해엔 행정안전부 비영리 민간단체로 선정됐다. 하지만 윤씨는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해양 쓰레기가 늘었지만, 그간 봉사활동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다. “섬은 고령화, 열악한 교육·의료 등 사회 문제가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이에요. 해양 쓰레기가 늘어나지만 그걸 수거할 사람이 없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난 7월 16일 섬마을봉사연합 회원들이 볼음도에서 해양쓰레기 수거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윤승철

윤씨는 활동 틈틈이 시간을 내 환경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환경에 대해 전문성을 갖게 되면 시야가 더 넓어지고 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행동을 끌어낼 수 있겠죠. 그게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이기도 하고요.” 어느덧 연년생 남매를 둔 활동가 아빠의 간절한 소망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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