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화려하게 수놓은 한국 국악의 오인오색
[이규승 기자]
▲ 지난 19일 오후 7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부산시민회관에서는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특별연주회가 열렸다. 이날 1200석에 이르는 대극장은 상당수가 객석을 자리해 공연에 대한 뜨거운 기대를 드러냈다. |
ⓒ 이규승 |
처음은 나뿐만 아니다. 지난 2007년에 시작해 올해로 14회째를 맞는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이하 '아창제')도 마찬가지이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해오던 연주회를 벗어나 지방으로 투어를 나선 것이 처음이다. 첫 경험에 나선 필자와 연주회의 부산 나들이는 이렇게 공통점이 보였다.
지난 19일,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with 아창제>의 사회를 맡은 윤중강 국악평론가의 능수능란한 진행으로 정숙함이 생명인 객석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행사를 완수한 내공이 느껴진다. 그의 맛깔스러운 입말이 빗장을 걸었던 관객의 마음을 녹였다.
"다른 곳에서는 조율을 할 때, 조금 작게 하거든요? 부산 사람들의 이 패기를 보세요."
총 다섯 곡이 이어지는 옴니버스 형식. 첫 공연이 들어서기 전, 단원들의 조율을 듣고 사회자가 이렇게 환대한다.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 작곡가에 대한 소개, 곡이 던져주는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가감없이 알려주는 그는 아나운서가 전하는 팩트와는 다르다. 아마도 이번 행사의 성공을 점친다면, 절반은 그의 몫일 정도로 객석을 쥐락펴락했다. 여튼, 공연장을 가면서 부산스러움을 느꼈고, 연주가 시작되기 전부터 부산스러운 장면이 익숙하진 않지만 편안해 보였다.
▲ 공연이 시작되기 2시간 전부터 부산을 처음으로 찾은 '아창제'는 관객을 맞고 있다. |
ⓒ 이규승 |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with 아창제>는 지금까지 선정된 작곡가들 중 다섯 명을 엄선했다. 최근 10년 이내 국악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배려했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각 곡들에겐 하나로 모아지는 공통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관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존중했다. 다섯 번이 서빙되는 진수성찬이 차려지지만 같은 맛은 배제했다. 간장과 고추장이 기본이라도 메인을 다르게 가져가는 형식으로 연출했다. 다섯 곡은 국악에 충실하라는 뜻에서 유민희의 '마음의 전쟁'(2013)으로 시작해 지금은 잊혀진 고구려 현악기인 향비파가 이끄는 김현섭의 '학을 탄 선인'(2017), 이란성 쌍둥이 같은 25현 가야금이 잔잔하게 울리는 이재준의 '별똥별'(2020), 비 내리는 장면을 타악기로 재연한 이예진의 '기우'(2019), 진도씻김굿을 부산시립합창단과 두 소리꾼이 완벽하게 완성시킨 이정호의 '진혼'(2017)까지 이어진다.
다섯 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악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해도 상관없다. 가야금과 거문고를 구분짓지 못하는 이들도 국악이 전하는 느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연주 순서는 뒤로 갈 수록 점차 채워지는 방식이다. 양념을 맛보기 전에 하얀 국물의 깊은 맛을 느껴보라는 것처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유 민희 작곡가의 심정을 대입하면 좋을 듯하다. 작품의 제목(마음의 전쟁)은 이 곡이 세상의 빛을 본 10년 전의 유행과 다르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일기장과 같은 느낌이라 소개했다. 이를 위해 사회자는 "아는 만큼 들린다"고 겁을 주지만 작곡가의 고백을 엿볼 수 있는 시간으로 충분하다. 뒤에 나오는 곡들과 다르게 협연자가 없지만,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특성을 최대한 살렸다. 그것은 각 악기들의 특성을 최대한 돋보이게 만든 곡으로 보인다. 인간의 희노애락에 따라 거친 숨소리에 맞춰 그의 심리는 점점 소용돌이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아창제가 지향하는 바("기교를 자랑하지 말고, 음악의 진정성, 동시대성을 바라보자")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곡을 꼽으라면 필자는 이것을 선택하겠다.
두 번째는 '가장 기대감 넘치는 작품'으로 선택된 곡(김현섭의 '학을 탄 선인')이다. 현실에서 벗어나 꿈속에서 볼 법한 판타지 덕분일 것이다. 실제로 행사에 앞서 관객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했는데, 압도적인 차이로 '가장 듣고 싶은 1위 곡'으로 뽑혔단다. 이유는 곡이 주는 묘한 분위기도 있겠지만, 협연으로 나선 생경한 악기 덕분이 아닐까싶다. 삼척동자도 아는 대표적인 가야금·거문고와 더불어 고구려의 대표 현악기였던 '향비파'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선다. 가야금과 거문고 사이의 음색을 표출하며, 악기를 세운듯한 독특한 모습으로 연주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김 씨는 고분벽화에서 영감을 얻어 향비파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현란한 손동작으로 튕기는 기법은 다른 국악관현악의 중저음 영역대와 다른 길을 지나는 것처럼 들린다. 묵직한 관현악과 비교해 돌고래를 연상시키는 낮은 주파수와 연주자(마룽)의 핑거스타일 손놀림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세 번째는 두 명의 아름다운 25현 가야금 연주자들이 협연자로 나선 이재준의 '별똥별'이다.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악단원들과 다르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차려입은 두 연주자(김보경, 박소희)가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고구려벽화에서 착안해 당대의 느낌을 표현했다면, 이번엔 우주의 신비로움으로 연주시간을 채웠다는 것. 작곡가는 어렸을 때 우주비행사를 꿈꿨던 기억을 들려주며, 과학의 '이성'과 무중력에서 헤엄치는 '감성'을 교차시켰다. 별똥별이 가져다준 우주의 움직임을 가야금으로 그대로 전달했다. 마치 우주선 안에서 둥둥 떠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 듯 말이다. 그것은 두 연주자들 사이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우주에서 공명을 체험하게 만든다. 무중력으로 늘어지는 장면에선 연주 속도를 점차 느리게 함으로써 관객의 몰입감을 배가시킨다.
▲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with 아창제> 공식 포스터 |
ⓒ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조직위원회 제공 |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한 곡은 앞선 협연자와 다르게 국악이 펼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무대에서 완성시킨 이정호의 '진혼'이다. 이것은 먼저 간 사람들을 위로하며 전염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인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악단을 중심으로 두 소리꾼(박성희, 정윤형)과 부산시립합창단이 가세해 스케일을 키웠다. 1200석이 비좁을 정도로 무대를 채운 연출은 3000석이 넘는 대극장에 적합해보일 정도였다. 서양 합창과 한국 소리뿐 아니라 개인과 단체의 이질성이 대비를 보여주며 국악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대에서 토해낸 종합선물세트였다.
국악과 클래식의 현대음악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연주자, 지휘자들이 마음껏 자신의 음악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아창제는 다른 연주회와 다르다. 아마도 "한국창작음악을 이끈다"는 진부한 수식어가 아니라 조금은 낯선 현대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을 위한 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연주회가 더욱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연주방식에 몰입해 기술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작곡가의 진심에 더 집중했으며, 국악이 아직도 생경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몸부림을 응원하기 때문에 더욱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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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현재 '2022 제14회 ARKO한국창작음악제' 작품접수가 오는 31일까지 진행 중이다. 선정된 작품은 내년 1~2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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