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빗장을 걷어낸 말 한 마디 "또 뵐게요"

박진희 2022. 8. 20. 18: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여는 품격 있는 말씨를 곱씹으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박진희 기자]

간간이 내리던 비는 엊저녁부터 주룩주룩 내리더니, 오늘은 종일 쏟아붓고 있다. 집 안에 갇혀 창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어느 하루의 일들이 불현듯 스쳐 간다.

장마가 끝날 즈음의 일이다. 지인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부탁할 일도 있고 하니 복요리 잘하는 집에서 점심이나 같이하잔다. "복집이면 가격 부담이 좀 될 텐데...", "아녜요, 싼 메뉴도 있으니 거기서 봐요." 

어떤 친절
 
 일 때문에 만나게 된 지인과 저렴하면서 맛있는 복탕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 박진희
내심 '복요리를 먹으면서 부탁받을 일이 뭘까?' 부담감이 컸다. 그러나 막상 식당에 가 보니, 우려와 달리 점심으로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저렴한 메뉴가 있었다. 

지인과 나는 한 투가리(뚝배기)에 9000원 하는 복탕을 먹고 나서, 일 얘기를 하러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일어섰다. 계산을 마치고 잘 먹었노라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려는데, 사장님의 인사말이 귀에 꽂힌다.

"네, 감사합니다. 또 뵐게요."

식당에서 흔히 듣던 "또 오세요"가 아니었다. 귀에 쏙 박힌 말 한마디에 그냥은 식당 문을 나설 수가 없었다. "사장님, 인상적인 인사말이네요"라고 말씀드리니, "아! 저도 시민대학에서 강사님한테 배운 거예요"라고 하신다. 

음식 맛있고 가격 저렴한 이 식당 사장님을 또 뵙게 될지 장담은 못 하겠지만, '가까운 지인들에게 아낌없이 입소문을 내리라' 다짐하며 식당 문턱을 넘었다.
 
 지인이 쪄서 먹어야 맛있다며 선물 받은 감자를 소분해서 나눠 주었다.
ⓒ 박진희
"별 거 아닐 수도 있는데, 나눠 드리고 싶어서요."

인근 카페에서 지인과 일 얘기를 가볍게 마쳤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려는 참에 잠깐만 기다리라던 지인은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먹어보니까 맛있어서 나눠 드리려고요"라며 트렁크에서 검은 봉지 하나를 꺼내 민다. 

봉지를 열어보니, 하지감자였다. 누가 선물이라며 줘서 감자 한 박스를 받았다는데, 쪄 먹어 보니 포슬포슬한 게 너무 맛있어서 가까운 분들과 조금씩 나누는 중이란다.

어찌 생각하면 10여 개의 감자는 지인의 말대로 진짜 별거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봉지에 든 감자를 보니, 받는 사람들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며 숫자대로 감자를 소분한 지인의 정성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이런 감자라면 구워도 맛있을 것이고 볶아도 맛있을 거라 여겨졌지만, 꼭 쪄서 먹겠노라 지인의 당부에 확답을 전하고 감사하게 봉지를 받아들었다.

긍정적인 말의 위력
 
 재래시장에서 아들과 채소전을 꾸리는 상인이 직접 재배한 옥수수를 손질하고 있다.
ⓒ 박진희
 
"아들, 오천 원이 필요해."

지인과 헤어지고 공주 오일장이 열리는 공주산성시장에 들렀다. 오일장이 열리는 때마다 둘러보는 골목에 들어서니, 채소 파는 가게 앞에서 집채만큼 옥수수를 쌓아놓고 껍질을 벗기는 현장이 목격된다.

농사지은 옥수수를 팔러 나온 난전의 아주머니는 아들과 함께였다. 껍질째 팔아도 될 일인데, 일일이 껍질을 벗기고 계셨다. 정성 어린 손길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손님이 옥수수 한 소쿠리를 달라며 만 원짜리 지폐를 내자, 아주머니는 아드님에게 "아들, 5000원이 필요해!"라며 거스름돈을 달라고 하셨다. 

그 바쁜 상황에서 "오천 원" 하시든가 "거스름돈"이라고 짧게 말씀하셨어도 충분히 의사는 전달됐을 터인데 "아들!"이라는 호칭을 붙이니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가 어찌나 다정하게 들리던지!

장터에서 소소한 감동을 주는 분들을 만나면, 물건을 팔아주는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이 얘기 저 얘기 물어보며 궁둥이를 붙이게 된다. 그렇게 옥수수 파는 아주머니네 좌판 인근에 앉아 있자니, 단골손님 한 분이 오시더니 아주머니 댁 물건이 좋다느니, 심성이 착하다느니 칭찬을 늘어놓으신다.

자두 하나를 얻어 드신 단골손님은 이야기 끝에 다른 곳에서 샀다는 기다란 파프리카를 사람 숫자대로 꺼내 놓으셨다. 실없이 사진만 찍어대고 있는 내 몫도 있었다. 건네받은 파프리카를 맛보고는 옥수수 파는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잘 마무리한 하루에 흡족해서 자리를 떠나왔다.

어제는 일 문제로 지인과 문자를 여러 번 주고받았다. 내색할 수 없는 서운한 일이 마음 속에 쟁여져 있다 보니, 상대방이 눈치 채길 의도하며 몇 차례 단답형으로 회신을 거듭했다. 내 속이 편치 않아서일까? 지인의 문자에서도 싸늘함이 감지됐다.

내일은 지인과 전화 통화로 일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내일 전화 통화를 어떻게 응대해야 하지? 온종일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는 빗줄기만큼이나 마음 속은 환해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변덕을 부렸다.

야속한 비 때문에 뜬금없이 복집 사장님, 감자를 건넨 지인, 옥수수 팔던 아주머니의 긍정적인 말들의 위력을 떠올리고 나니, 나와 상대방 모두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품격 있는 표현법을 곱씹게 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