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왜 각본집이 잘 팔리나

2022. 8. 19.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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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나도 각본집을 샀다. ‘헤어질 결심’ 영화 각본집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 서래와 해준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이 만든 것보다 더 근원적인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었다. 문자로 확인하고 싶었다.

영화나 드라마 각본집이 서점가에서 화제다. 각본집이 잘 팔리는 세태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십 년 전만 해도 출판계에서 각본집 출간은 드문 사례였다. 적어도 일반 독자들이 읽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계에서는 배우나 관계자들이 공유하는 각본집을 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화인이 책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헷갈렸다. 종이를 여러 장으로 묶어 맨 물건이 책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비춰 봤을 때 자연스러운데도, 출판인으로서 그건 책이 아니지 않은가 자문자답했다. 그동안 영화계 흐름도 바뀌어 이제는 책으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촬영 현장에서는 그날 분량만큼 복사한 콘티북을 나눠 갖고 촬영을 진행하기에 책으로 부를 만하지도 않다고. 이제 각본집은 촬영 관계자가 아니라 독자들이 더 많이 읽고 있는 셈이다.

대형 서점에서는 올해 상반기 주요 이슈로 ‘각본집 출간 유행’을 선정했다. 독자는 왜 각본을 읽는 것일까. 먼저 살펴볼 것은 좋아하는 작품이라면 책을 한 번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독자가 늘었다는 점이다. 출판 상황의 변화를 이런 독자들이 추동한다. 어떤 책이든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더 깊숙이 느끼고 싶어한다. 작가의 북토크에서 독자들의 적극적 태도에 놀란 적이 많다. 작품 말고도 작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는 작가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호기심을 발산하는 독자의 댓글도 낯설지 않다. ‘사진 속의 그 스카프는 어디에서 사셨나요’, ‘앉아 있는 의자는 편안한가요. 어디 제품인가요’ 같은 댓글은 어색하지 않다.

작가는 작품을 쓰고, 독자는 읽는다는 단순한 명제는 사라지고 있다. 독자는 작가가 의식하지 못한 행간의 의미를 새롭게 구축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전통적 독서법이지만 그 이해를 여러 각도에서 해보려는 실천력은 새로운 것이다. ‘덕질’이라는 용어가 책에도 연결된다.

각본집 인기를 이런 맥락에서 헤아렸다.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나는 영화이고, 살인 사건을 통해 피의자와 형사로 만난 두 사람이 사랑하는 이야기다. 각본집에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지문을 통해 서술돼 있다. “암호를 요구하는 화면이 뜨자 실망하는 두 형사.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수완, 재빨리 머리를 매만지더니 마중 나가듯 앞으로 나선다. 정신없이 들어서는 송서래(30대 후반). 전화기 화면을 재빨리 보는 해준. 사진 속 그 여자다. 서래, 수완 먼저 보고 해준과 눈이 마주치고 그다음 흰 천이 덮인 시신을 발견한다.”

딸로 오해받는 서래가 등장하는 각본집의 서술은 건조하면서도 뜨겁다. 이 장면만 읽어도 각본집을 읽는 매력인 다층적 독해가 이뤄진다. 빠르게 컷을 그리되 미세한 요소를 놓치지 않는 문장이 머릿속 영상을 만들어낸다. 영화가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든 마지막 신을 각본에서 읽어본다. “해 지는 바다에 내려앉는 안개가 멀어지는 해준의 뒷모습을 감싼다. 트윈폴리오의 ‘안개’ 시작.” 서술형 동사가 아닌 명사로 끝나는 각본집의 마지막 단어, 시작. 가수 송창식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각본집 읽는 기쁨을 확실히 알았다. 서래가 해준에게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좋아하는 영화를 깊이 기억하려는 의지는 영상을 보는 것을 넘어 문자를 ‘읽어보게’ 한다. 각본집은 나만의 시공간에서 영화 속 감정을 재체험하게 만든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에 빠진 열혈 독자의 힘, 그 파장은 대단하다. 출판계에서는 이런 독자를 어떻게 붙잡을지 고민하고, 그리고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고심한다. 각본집이 사랑받는 건 이런 대세적 흐름 속에 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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