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가 없는 의도로 만드는 드라마 [친절한 쿡기자]
최근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찾아 읽었습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우영우’는 다른 드라마와 달리, 매회 방송될 때마다 시청자들이 이야기하고 관심을 가질 담론을 이끌어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드라마에 나온 “지금도 수백명의 사람들이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이란 글에 좋아요를 누릅니다”라는 대사에서 힌트를 얻어, 드라마에 달린 댓글이 다시 우리 현실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우영우’를 본 사람들이 쓴 댓글과 좋아요를 분석하는 기사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댓글에 시청자들이 느낀 분노와 혐오가 악귀처럼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점점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조사하던 중, “왜 드라마에 의도를 넣느냐”고 분개하는 댓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영우’가 페미니즘 논란, 고 박원순 전 시장 미화 논란 등에 휘말린 직후에 달린 댓글들입니다. 비슷한 댓글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메시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건 엄연히 다르다”며 “(그럴 거면) 순수한 오락 드라마를 만들던가”라고 지적했습니다. 댓글을 쓰고 공감을 누르는 일부 시청자들은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가 불편해졌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치적 입장이나 가치관 차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TV에서 방송되는 드라마가 자신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하려 한다는 사실 자체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의도’라는 단어를 보니 한 인터뷰 기사가 떠올랐습니다. 최근 ‘안나’ 편집권을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주영 감독이 쿠팡플레이가 일방적으로 작품을 편집해 훼손했다고 폭로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감독은 지난 11일 공개된 씨네21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왜 모든 장면을 의도를 갖고 찍었느냐”는 쿠팡플레이 측의 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의도가 없는 대사는 쓸모가 없고, 의도 없는 장면은 편집 과정에서 뺀다는 건 영상 문법의 기본”이라며 “작품을 평면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아서 다들 얼마나 노력하나. 연출자와 배우들은 모두 그 목적을 위해서 엄청나게 고생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들었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얘기니까요. 장면과 대사에 담긴 의미와 의도가 잘 드러나도록 해야 작품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믿는 창작자들은 저보다 훨씬 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겠죠.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돌아보는 이주영 감독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동시에 아마 쿠팡플레이 입장에선 경고하는 의미로 한 말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음 계약할 때 서로 대화하고 합의하면서 생각한 것과 다른 결과물에 ‘선을 넘었다’고 느꼈고, 그 원인을 감독의 의도로 돌리려는 것 아니었을까요. 거칠게 표현하면 시청자 시선을 붙잡고 재미를 주는 순수한 오락물을 기대했지만, 감독의 예술 작품처럼 느껴진 나머지 남의 돈으로 왜 예술을 하냐는 의미를 전달하려고 한 말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작품을 볼 대중 반응을 예상하고 그 예상을 중심으로 전략을 짜는 입장과 공들여 작품을 직접 만드는 입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의 일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감독 동의 없이 마음대로 작품을 편집해 공개하는 행위를 용인할 순 없지만요.
대중에 공개된 작품을 두고 다양한 평가와 비판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창작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작품 속 창작자 의도를 문제 삼는 건 우영우가 좋아하는 고래 퀴즈처럼 흥미롭습니다. 작품에 의도가 있냐 없냐, 혹은 6부작과 8부작 중 뭐가 더 재밌냐는 논쟁에 빠지는 건 문제에 현혹돼 오답으로 빠지는 길입니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보는 순수 오락 콘텐츠가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성 있는 콘텐츠보다 우위에 선 현실이 정답에 가까워지는 본질처럼 보입니다. 창작자 의도를 검열하는 걸 넘어 콘텐츠를 마음대로 가위질하는 사태 역시 대중이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에 대한 확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아닐까요.
대중이 보내는 신호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건 창작자들이 해야 할 몫이겠죠. 동시에 의도에 대한 검열이 콘텐츠 작품성과 완성도, 다양성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은 소비자들이 유념해야 할 몫입니다. 드라마 후반부에 악성 댓글이 줄줄이 달린 ‘우영우’는 그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 덕분에 초반부 엄청난 극찬을 받았습니다. 무단 편집된 상태로 공개한 ‘안나’가 호평 받은 것 역시 장면에 대사에 녹아있는 감독의 의도가 어느 정도 전달됐기 때문이겠죠. 창작자 의도 여부를 검열하는 대신, 입장과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로 접근하는 것이 덜 폭력적이고 더 발전적인 논의로 이어질 겁니다. 왜 모든 장면에 의도를 넣은 건지 모르면, 진지하게 그 이유를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과연 쉽고 단순해서 돈이 되는 순수 오락물은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이 만들어지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물론 이 기사는 아무런 의도 없이 작성했습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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