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37)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기정진(1798∼1876)
공명도 너 하여라 호걸도 나 싫어서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데 없건마는 흥(興) 다하면 갈까 하노라
-노사집(蘆沙集)
지식인은 난세를 어떻게 사나?
노사 기정진(奇正鎭)은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 기대승(奇大升)을 배출한 호남의 명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 수양에 힘썼다.
68세 때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六條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위정척사의 이론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궐문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일본과의 조약 체결에 반대한다는 소리를 듣고 “동방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피할 수 있겠다”며 기뻐하기도 했다.
그는 책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았고 실천했다. 위태로운 나라 앞에서 스스로 나아감과 물러남을 알았으니 경전 속에 스승과 벗이 있었다. 고종 13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78세 노구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붓과 벼루를 버렸다.
난세를 사는 옛사람의 결기가 이러하였다. 특히 지식인의 삶의 미덕은 자신을 버리는 데 있었다.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나 호기로운 삶도 마다하고 수양에 힘쓰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결연히 일어서 몸을 바쳤다. 한국식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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