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빨개지는 아이가 장 자크 상페 작가님께
<꼬마 니콜라>,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작가이자 프랑스의 삽화가 장 자크 상페(90)가 지난 11일 별세했습니다. 이에 고인의 명복을 빌며 추모 기사를 싣습니다. <편집자말>
[최지혜 기자]
고등학교 시절 내 별명은 '낮술'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낮부터 술을 마실만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고딩은 아니었다. 오히려 범생이에 가까웠다. 그런 내가 교실에서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은 빨간 얼굴을 하고 있으면, 몇몇 짖궂은 친구들이 다가와 '어이 낮술, 낮술' 부르며 놀리곤 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내 별명은 줄곧 빨간 얼굴과 관련된 것이었다. 볼 빨간, 홍당무, 빨갱이, 불암산 같은. 나중에서야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가 안면홍조증이라는 질병 때문인 줄 알았지만, 어린 시절엔 그저 내가 촌스러운 아이라 이런 '촌년병'이 생겼나 싶어 자주 의기소침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만나다
▲ 책장에 꽂혀 있던, 20년도 더 된 <얼굴 빨개지는 아이> 당시 홍대생이던 친구가 지금은 없어진 홍대 앞 동남문고에서 사서 선물로 주었다. |
ⓒ 최지혜 |
모든 사람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대도시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마르슬랭과 르네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장난치며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옆에는 이제 그들을 꼭 닮은 아이들도 함께다.
20년도 더 된 일이라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때 친구는 자기가 르네가 되어 주겠다고, 우리 마르슬랭과 르네처럼 평생 좋은 친구가 되자며 낯간지러운 멘트 같은 걸 했던 것 같다. 그 얘기에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에게 책을 선물 받고 한동안 나는 마르슬랭에 푹 빠져 살았다. 작고 소중한 내 영혼의 친구. 그 당시 만들었던 아이디나 닉네임은 다 마르슬랭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장 자크 상페, 책은 당연히 <얼굴 빨개지는 아이>였다.
그 시절, 마르슬랭을 분신처럼 여겼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장 자크 상페의 책을 좋아한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이들을 보면, 어딘지 얼굴이 빨갰다(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그의 책은 나와 같이 안면 홍조증을 앓는 이들은 물론, 재채기를 하고 말을 더듬고 머리가 빠지는 등 남모를 콤플렉스로 끙끙댔던 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합법적으로 화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화장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면서 빨간 얼굴에 대한 고민은 점점 옅어졌다. 어쩔 땐 발그레한 볼 덕분에 따로 볼터치를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내가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였다는 사실도 조금씩 잊혔다.
장 자크 상페가 불러온 20여 년 전 추억
지난 11일 장 자크 상페가 별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나이 90세. 그때도 할아버지였는데, 정말 할아버지가 되셔서 돌아가셨구나. 오랜만에 들린 소식이 슬픈 소식이라 울적했는데 가족들과 친구들의 품 안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접하며 한결 마음이 놓였다.
▲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의 한 장면 두 아이의 성품과 마음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
ⓒ 최지혜 |
그날 밤 두 꼬마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서로 만나게 된 것을 아주 기뻐했다.
(말풍선) 그 마르슬랭 까이유라는 애, 아주 착한 것 같아. 가끔씩 아주 멋진 색깔의 얼굴로 돌아오기도 하고. 아 취!
(말풍선)어, 재채기하는 소리가 들려, 분명히 르네 라토일 거야. 한밤중에 이렇게 친구의 목소리를 듣다니, 너무 좋아...
마르슬랭은 감기에 걸릴 때마다 그의 친구처럼 기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해했다. 그리고 르네 역시 햇볕을 몹시 쬔 어느 날, 그의 친구가 가끔씩 그러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 버린 것에 아주 행복해한 적이 있었다. 둘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마르슬랭과 르네가 처음 만나 친구가 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씩 미소가 지어졌다. 서로를 닮아간다는 생각에 행복해하는 두 사람 덕분에 책을 보는 내내 나도 행복했다.
마르슬랭은 르네를 다시 만나자 갑자기 어린 시절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로 돌아갔다. 함께 달리기도 하고, 엉뚱한 놀이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아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존재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 두 사람은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상페의 부고 소식으로 나도 오랜만에 그 친구와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한참 수다를 떨었다.
"동남문고(지금은 없어진 홍대 앞 서점)? 너, 기억력 뭐야? (웃음) 우리가 그렇게 꽤 살았구나. 우리 추억이 있네."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선물했던 나의 27년지기 친구는, 이제는 빨간 얼굴이 아니라 코로나에 걸려 콜록대는 나의 건강을 걱정한다. 1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하지만 언제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고, 연락을 하지 않아도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친구.
세월에 바랜 책장을 넘기며, 문득문득 생각에 잠기며, 내 어린 날의 한 페이지를 따뜻하게 채워준 상페에게 감사했다.
▲ 장 자크 상페 몰랐는데, 사진을 보니 어딘지 마르슬랭과 닮았다. 심지어 얼굴도 빨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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