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동철 칼럼] 퐁니·퐁넛 마을의 참극

라동철 입력 2022. 8. 17.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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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이 마을
주민 대량 학살했다는 의혹
기밀해제된 주월 미군사령부
조사보고서 관련 사실 뒷받침

손해배상 소송 제기한 피해자
최근 방한해 첫 법정 증언

책임 부인해 온 한국 정부는
이제라도 진상 규명 협조하고
잘못 있으면 사과·배상해야

베트남인 응우옌 티 탄(62·여)씨와 그의 삼촌 응우옌 득 쩌이(82)씨가 최근 8박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한국 정부 상대 국가배상 청구 소송 재판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사건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티 탄씨는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발생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득 쩌이씨는 남베트남 민병대원으로서 당시 마을 인근 초소에서 망원경을 통해 학살 과정을 지켜봤고 한국군이 철수한 후 미군과 함께 마을에 들어가 시신과 부상자들을 수습했었다.

두 사람이 법정과 간담회,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털어놓은 경험담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티 탄씨는 당시 8살이었는데 한국군의 공격으로 엄마, 언니, 남동생, 함께 살던 이모와 이모의 8개월 된 아들 등 5명의 가족을 잃었고 자신도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의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총소리가 나길래 집 방공호에 숨었는데 한국군이 수류탄을 던질듯한 시늉을 해 나갔다가 총탄에 맞았다고 밝혔다. 집을 불태우려는 한국군을 말리던 이모는 아이와 함께 총검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생존 주민들이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에 항의해 진상 조사가 이뤄졌지만 이 사건은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주월 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사건 조사보고서가 2000년 6월 기밀해제로 공개되면서 진상이 알려졌다. 554쪽 분량의 보고서에는 한국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학살 내용이 20여장의 첨부 사진과 함께 수록돼 있다. 청룡부대원들은 퐁니 마을에서 날아온 총탄에 대원 1명이 부상을 입자 마을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주민 69명이 총과 칼에 의해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이었다.

전쟁 와중이라고 해도 비무장 민간인, 그것도 여성과 어린이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은 반인륜적 전쟁 범죄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도 퐁니·퐁넛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앙정보부가 사건 1년 뒤 해당 군인들을 조사해 마이크로필름 자료를 남겼는데도 진상 규명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대법원이 2021년 3월 국가정보원에 갖고 있는 해당 조사 목록을 공개하라고 판결했지만 조사받은 대원 3명의 이름과 출신지가 적힌 복사본 한 장만 공개했을 뿐 추가 자료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티 탄씨는 2019년 한국 정부에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청원을 냈으나 거부되자 이듬해 4월 정부를 상대로 3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퐁니·퐁넛 마을 작전에 참여했던 전직 해병대원 류진성씨가 지난해 11월 법정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증언했지만 소송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다. 학살이 인정되더라도 외국인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은 양국의 상호보증이 전제돼야 하는데 그 부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대통령들이 한국군의 잘못에 대해 사과할 뜻을 밝히고 진상조사와 배상을 제안했지만 베트남 정부는 소극적이다.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사이에 벌어진 다수의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되는 걸 꺼리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게 우리 정부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알리바이가 돼서는 안 된다. 민간인 학살은 전쟁 와중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범죄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 인정과 베트남전 참전의 정당성 여부는 별개의 사안이다. 숨기고 싶은 치부지만 진상을 밝히고 잘못이 있었다면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합당한 배상을 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 수 있다. 티 탄씨는 지난 11일 참전 군인 류진성씨로부터 “가해군 중 한 사람으로서 사죄한다”는 말을 듣고는 “용기 내줘 고맙다”고 답했고 “마음속으로 그를 용서했다”는 소감을 밝혔다고 한다.

티 탄씨는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들이 학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지난 12일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이제 우리 정부가 나서야 할 때다. 무고한 민간인에게 고통을 안겨줬다면 양국 정부 간 합의 여부에 상관없이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도리다. 우리부터 그러해야 다른 나라의 잘못도 당당하게 지적할 수 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한을 풀어주는 건 외면하면서 일본에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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