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반지하의 비극, 여성 3대

양성희 2022. 8. 1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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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불평등이 생존의 불평등으로
현실로 다가온 기후변화 대비에
장애인 돌봄 대책까지 과제 던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록적 폭우로 서울 도심이 물바다가 된 지난주, 외신들도 일제히 소식을 전했다. 영화 ‘기생충’으로 널리 알려진 ‘반지하’가 실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현장을 보도하며 BBC는 “현실에서의 결말은 더 최악”이라고 했다. 한국어 발음 그대로 쓴 ‘banjiha(반지하)’는 한국적 주거 불평등의 상징이자 사회적 약자일수록 재난에 취약하며, 경제적 불평등이 생존의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회적 메타포가 됐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행복한 가족이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이들을 밝고 사랑 많은 가족으로 기억했다. 발달장애인을 포함한 40대 자매와 초등학생 딸이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신림동 반지하 가족 얘기다. 당일 오전 입원한 70대 노모는 다행히 화를 면했지만, 가족의 비극을 어찌 이기며 살아갈까 안타까울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재난 현장을 찾았지만, 현장 사진을 대통령실이 홍보용 카드뉴스로 만들면서 논란만 일으켰다. 대통령이 쪼그리고 앉아 반지하 창문 안을 내려다보는 사진에 ‘침수 피해 지역 현장점검-국민 안전이 최우선입니다’라는 문구를 달았다. 국민이 안전하지 않은 재난 현장의 주인공이 대통령일 수는 없는 일이다. ‘재난을 국정 홍보에 이용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 8일 집중호우로 침수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주택.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연합]

오세훈 서울시장은 10~20년 내 주거용 지하·반지하 건축물 완전 퇴출을 선언했으나 싼집을 찾아 지하로 흘러든 이들은 어디로 가란 말이냐는 항변이 나왔다. 정책 방향이야 맞지만 구체적인 설계안이 미비하고, 2010년 수해 때 내놓은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번 집중호우가 기후변화의 일환이고 앞으로 기상이변은 더욱 잦아질 텐데, 폭염으로 옥탑방 사고가 잇따르면 옥탑방을 다 없애자고 할 건가. 실제 폭염이 한창이던 지난해 8월 서울의 한 옥탑방에서는 혼자 세 들어 살던 30대 남성이 사망 일주일 후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뇌병변 장애와 희귀질환을 앓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다.

신림동 가족은 여성 3대가 같이 살았다. 지병이 있는 70대 노모,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자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발달장애인 언니, 그리고 열세 살짜리 딸까지 4인 가족을 백화점 면세점에서 협력업체 소속 판매직으로 일하는 40대 여성 가장이 부양했다. 워킹맘으로 생계를 책임지며 육아에, 아픈 어머니와 장애 언니 돌봄까지 도맡았던 그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조차 조심스럽다. 외부 침입과 관음증 범죄에 취약한 반지하 주택은 흔히 방범창을 설치하는데, 이 집은 여자들만 살았기에 30cm 높이 창문 4개에 전부 방범창을 달았다. 구조에 나선 이웃들이 방범창을 뜯어내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안전하게 살기 위해 설치한 방범창마저 삶의 안전을 빼앗아버린 참담한 아이러니의 현장이다.
신림동 참변 하루 전에는 상도동의 반지하 셋방에서 폐지를 줍는 노모와 함께 살던 50대 발달장애 여성이 폭우에 목숨을 잃었다. 노약자, 장애인, 반지하, 빈곤, 주거안전 미비 같은 키워드들이 겹쳐진다. 사회적 돌봄 체계가 취약해 개인과 가정에 맡겨진 장애인 돌봄의 문제도 사회적 과제로 떠올랐다. 정부가, 정치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나마 이번 참변의 수확이라면, 그저 멀게만 느껴졌던 기후변화가 내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의 문제로 바짝 다가왔음을 인식하게 됐다는 것 아닐까.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앞서 할리우드 진출작인 ‘설국열차’에서 얼어붙은 지구에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이 사투를 벌이는 미래를 그렸다. 2013년 영화로, 놀랍게도 극 중 배경이 2031년이다. SF적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하루가 멀다고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상이변의 맹렬한 사이렌 탓인지 예전처럼 무심히 넘겨지지 않는다. 그날 밤 폭우는 공포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아도 될까. 안 될 말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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