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상대를 존중할 때 우리 국격이 올라간다"

예영준 입력 2022. 8. 17. 00:57 수정 2022. 8. 1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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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용 전 대사가 돌아보는 대만 단교 30년의 교훈
"새 친구 사귀어도 옛 친구 버리지 않는다"는 말 못지켜 대만 분노
특사 파견하고 친서 보낸 일본 · 사우디아라비아 사례와 크게 대비
중국 눈치 보느라 미숙하게 처리한 단교 과정, 중국에도 평가 못받아
예영준 논설위원

북방외교는 분단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지구촌 반쪽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이 탈(脫)냉전의 전환기를 기회로 삼아 스스로 울타리를 깨고 나간 대한민국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 북방외교의 완성이 오는 24일로 30주년을 맞는 한ㆍ중 수교였다. 삼십이립(三十而立), 나이 삼십이면 소신과 입장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10년을 더 보태면 흔들림이 없는(不惑)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지난주 박진 외교장관과의 회담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삼십이립을 꺼낸 것은 지금의 한ㆍ중 관계가 그렇지 못한 위기 상황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중국 두 당사자의 힘과 위상도 30년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고 주변 환경은 지금 이 순간에도 크게 요동치고 있다. 그간의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 변화된 상황에 걸맞는 대중 관계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에 와 있는 것이다.

1992년 8월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이 한ㆍ중 수교 문서를 교환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한ㆍ중 수교 30년은 당시까지 ‘중화민국’ 혹은 ‘자유중국’이란 별칭으로 부르던 대만과의 단교 30주년이기도 하다. 때마침 30년전 대만과의 단교 순간을 타이베이의 주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겪었던 조희용 전 캐나다 대사가 최근 『중화민국 리포트 1990-1993』란 책을 펴내 당시의 세세한 기록을 공개했다. 그는 대만 단교 이후에도 주중 대사관과 서울의 외교부 본부에서 중국 업무를 계속 담당했던 외교관이다. 조 대사와의 인터뷰를 지면에 옮기는 데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지금 되짚는 실리가 무엇이냐는 반론과 함께, 최근의 반중감정과 맞물려 30년전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정독한 결과 조 대사는 대만과의 단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국 외교의 미숙함이 드러났고, 지금도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미숙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반면교사로서 책을 쓰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또한 대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지난 30년 한ㆍ중 관계를 되돌아보고 향후 30년의 관계 설정을 위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대만과의 단교 순간 타이베이의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외교현장을 지킨 조희용 전 주 캐나다 대사. 김경록 기자

1992년의 한국은 30개 남은 대만의 수교국 중 하나였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유일한 대만의 벗으로 남아 있었던 건 반공 진영의 최일선을 함께 지켜 왔다는 연대의식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에 앞선 일제강점기동안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국민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1943년 카이로 선언에 한국 독립 조항이 들어가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역사적 사실도 한-대만 관계를 각별하게 했다.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은 늘 “새 친구를 사귀어도 옛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로 대만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말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한ㆍ중 수교는 대세였고 그에 따른 단교는 대만도 예상하고 있던 일 아닌가.
“대만도 언젠가는 닥칠 일로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형제국가나 다름없던 한국은 중국과 수교를 하더라도 대만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해 줄 믿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수교 협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대만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막상 수교협상이 타결되고 통보하는 순간은 다른 나라들의 경우보다 더 대만의 분노를 샀다. 단교 자체보다 단교 전후에 보인 한국의 태도와 언행이 대만의 국격과 존엄을 침해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

한ㆍ중 수교와 대만 단교 발표 직후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서울 명동의 '중화민국' 대사관 앞에 모여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경제협력과 민간교류에서부터 꾸준히 관계를 개선해 오던 한국과 중국은 1992년 4월 첸지천(錢其琛) 외교부장의 공식 제의에 따라 전격적으로 수교 협상에 착수했다. 양국이 서로 원하던 바여서 협상은 일사천리였다. 세차례 예비회담과 차관급 본회담 한차례를 통해 수교 문서와 조건, 절차를 확정하고 8월 24일 외교장관의 발표만 남겨둔 상태였다. 문제는 그 사이에 발생한다. 한국이 사전에 진행상황을 알리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교 사실을 미리 알릴 순 없지 않나.
“물론 협상중에는 보안이 절대 명제다. 수교를 바라지 않는 북한과 대만의 방해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이 타결되고 수교가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됐다고 알렸어야 하는데 한국 정부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지 않았다. 수교 엿새 전 외교부 장관이 주한 대만 대사를 호텔에 불러 ‘한ㆍ중 수교 협상에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고 말한 게 실질적으로 최초의 통보였고 공식 통보는 8월21일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된 외교장관의 공한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5시를 골랐다. 이런 과정이 적절했다고 할 수 없다. 다른 우방국의 단교 사례에 비춰봐도 비교가 안된다. ”

-다른 나라들은 어땠나.
“일본이 1972년 수교를 할 때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는 외무대신을 역임한 거물 정치인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를 특사로 대만에 보냈다. 그 때 다나카 총리는 외무성이 쓴 친서 초안을 특별히 일본 한학의 대가에 부탁해 격조있는 한문체로 바꿔 쓰게 했다. 미국은 단교 보름전 통보를 하고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을 보내 단교 후의 관계 설정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크리스토퍼는 시위대의 계란 세례를 맞았지만 감당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보다 2년 앞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과 수교했는데 대만과 각별한 사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나라임에도 단교 전 국왕이 장관급 특사를 보내고 친서로 양해를 구했다. ”

-그렇다면 중국은 북한에 어떻게 통보했나.
“수교 40일 전인 7월 15일 첸지천 외교부장이 북한에 가 헬기를 타고 묘향산에 있던 김일성 주석에게 장쩌민 주석의 친서를 전하고 수교를 통보했다. 한국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7월말 협의차 베이징에 간 외무차관이 중국측에 ‘북한에는 통보했냐’고 물었더니 답을 않고 ‘한국측이나 대만 문제를 잘 처리하라’고 했다. 당시 평양에 갔던 장팅옌 대사가 나중에 쓴 회고록에 김일성에게 수교 계획을 통보한 사실을 밝히면서 ‘한국은 대만으로부터 망은부의(忘恩負義)라고 비난받았다’고 기술했다. 이게 뭘 의미하겠나. 한국은 중국 눈치를 보느라 대만에 대해 격을 낮춰 대하고 통보도 늦췄는지 모르지만, 중국조차 그런 행위를 좋게 보지 않았다. 상대를 존중할 때 우리 국격도 올라가는 것이다. ”

조 전 대사가 보관해 온 1992년 대만 단교 전후의 업무 메모와 대만 언론의 기사 스크랩


한국이 감당해야 할 후과는 컸다. 대만은 즉시 한국의 직항편 취항을 금지하는 단항(斷航) 등 제재조치에 들어갔다. 복항을 위한 항공협상이 진행되는 기간중 한국 외교관이 귀갓길에 괴한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는 사건도 일어났다. 단교 직후 대만에 간 고위사절단 일행은 공항에서 귀빈실 사용을 거부당해 복도에서 도착 성명을 발표해야 했고 예정된 만찬이 당일 취소당하는 홀대를 겪었다. 항공편 단항 조치가 풀리기까지는 12년의 세월이 걸렸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손실이 더 클지 모른다. 당시 한국 외교부 간부는 대만 방문을 마치고 한국에 온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로부터 “외교에도 로얄티(충정)가 있다”는 따끔한 지적을 받았다고 훗날 회고록에 적었다.
-대만에서 단교를 겪고 난 뒤 주중 대사관과 외교부 본부에서 중국 담당 과장으로 계속 중국 업무를 했다. 한ㆍ중 수교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반쪽 외교에서 전방위 외교로 나가는 북방외교의 정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이고 대만과 단교를 한 것도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중국과의 수교를 택한 것이 지난 30년간 한국의 경제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도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루지 못한 것도 있다. 우리가 중국에 기대했던 전략적 목표 가운데 중요한 것이 한반도 통일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전 각료들을 불러서 회의할 때 ‘이제 우리는 통일 과정에 진입했고, 금세기 말까지는 국가연합은 달성할 거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냉철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박진 장관이 지난주 중국에 가서 왕이 외교부장에게 북한이 도발 대신 대화와 외교를 선택하도록 중국 측이 건설적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중국의 건설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과연 30년간 중국이 그 역할을 어떻게 해 왔는지 한번쯤 평가해 볼 시기가 됐다. ”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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