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현현기경』과 QR코드

입력 2022. 8. 17. 00:02 수정 2022. 8. 17.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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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돌 흰 돌

바둑은 전설적인 중국의 성군 요(堯)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를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의심이나 반론도 많았던 것 같다. “어리석은 인물은 성인의 인의예지로서 가르쳐야 할 것인데 어찌 오만 한가하게 노는 기구와 변화막측한 술법으로서 그 어리석음을 더하게 하셨을까.”

중국 원(元) 나라 때의 바둑책 『현현기경(玄玄棋經)』은 여기에 답한다.

“(…) 대저 바둑의 도는 하늘과 땅의 모나고 둥근 형상이 있고 음과 양의 움직이고 고요한 이치가 있고 성진의 분포하는 서열이 있고 풍운의 변화하는 기틀이 있고 봄과 가을의 살리고 죽이는 권도가 있고 산하의 겉과 안 같은 형세가 있으며 세도의 오름세와 내림세, 인사의 성하고 쇠하는 이치가 모두 여기에 있다. 따라서 유능한 이만이 인(仁)으로 지키고 의(義)로 행하며 예(禮)로 질서를 정하고 지(智)로 사리를 판단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다른 기예와 같이 보아 소홀히 할 것인가.”

바둑은 성인이 ‘아들 교육’을 위해 만들었고 그에 걸맞게 온갖 세상의 이치가 담겨있으니 바둑을 단지 ‘종횡의 술법’으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역설한다.

바둑에서 불멸의 고전으로 꼽히는 『현현기경』은 당대의 국수 안천장과 엄덕보가 황제의 명을 받아 1349년 펴냈다. 진귀한 사활 묘수 347개를 수집해 실었는데 그 죽고 사는 모습은 실로 재미있고 기기묘묘하다. 때로는 한 개의 해답이 괴이한 모자이크처럼 판 전체를 뒤덮는다.

또 2000년 전인 한나라 때의 문인 반고의 기국론, 마융의 합전론, 노자의 통미설 등 아득한 고대로부터 내려온 바둑론들을 싣고 있다. 실제 작업 책임자는 우집이라는 대신인데 위에 소개한 글은 그가 쓴 서문에 들어 있다.

바둑론을 좀 더 보자면 당나라 문사 이필의 탁정론(度情論)은 대국 심리와 대국 자세를 살피는 교과서 같은 글이다. “싸움에 이겼다 하여 교만한 자는 퇴보한다. 제 스스로 적을 두려워하는 자는 강하고 아무도 나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 자는 망한다.”

진나라 때 죽림칠현이 남긴 글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고수는 교만함이 없고 하수는 겁이 없다.”

겁 없는 하수가 세상을 뒤집기도 하지만 하수가 겁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비 오는 여름날, 낙숫물 소리 들으며 『현현기경』을 읽는다. 예전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놀란 대목은 마융의 합전론 첫 부분이었다. “고수는 어복을, 하수는 변을, 중수는 귀를 차지한다.”

바둑은 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 사람은 왜 허공 같은 중앙을 더 중요하게 봤을까. 그러나 AI가 등장하면서 고자재복(高者在腹)이란 네 글자가 각광을 받게 됐다. 5선에서도 서슴없이 어깨를 짚는 AI, 돌을 버리고 에워싸기를 밥 먹듯 하는 AI가 중앙을 고수의 땅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일본어 공부하는 친구로부터 엊그제 묘한 내용을 받았다. 방송국 교재의 한 페이지인데 내용은 이렇다. “이제는 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QR코드. 그 QR코드 개발자는 ‘덴소(DENSO)’의 기술자 하라 마사히로씨. 그는 1994년 1차원인 바코드의 200배 정보량을 가진 2차원의 QR코드를 만들었는데 힌트를 바둑에서 얻었다. 점심시간에 바둑을 두고 있던 하라씨는 종횡으로 얽힌 흑백의 배치에 착안하여 종과 횡으로 흑백의 사각형이 나열된 QR코드를 만들었다.”

4500년 전 요임금이 만들었다는 바둑. 『현현기경』 서문에서 우집은 바둑이 ‘종횡의 술법’이 아니라 성현의 심모원려가 담긴 도(道)라는 사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한다. 그런데 그 종횡의 술법이 엉뚱하게 QR코드 탄생의 숨은 주인공이라니!

바둑판 하나를 가득 채운 『현현기경』목왕행팔방세(穆王行八方勢)를 보자니 정말 QR코드와 닮았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아주 옛것과 지극히 현대적인 것은 서로 통하는 것일까.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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