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현장 답사 큰 호응.. 교회에 활력 넘쳤습니다

입력 2022. 8. 16. 18:42 수정 2022. 8. 16.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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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새중앙교회 황덕광 목사
캄보디아 단기선교 중 현지인에 기도해 주는 황덕광 목사. 황목사는 “종의 자세로 주님이 맡기신 교회 양 무리를 겸손히 섬기는 사역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믿음의 선친인 아버지와 기도의 능력자인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생명 구하는 것과 이 사역을 위한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은 내 생애의 잊지 못할 큰 선물입니다.

필자의 신앙 여정은 이러했습니다. 1959년 7월 6일 저의 선친 고 황하운 목사와 몇 분의 성도들이 당시 서울 서대문구 성산동 개인 가정에서 모여 예배드림으로 성락교회(현 새중앙교회)가 태동하게 되어 초대 당회장 황하운 목사(1959-1860), 제2대 당회장 황덕창 목사(1960-2012), 제3대 황덕광 목사(2012-현재)가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첫째 형님은 고 황덕윤 목사(예장 통합측)이시고, 들째 형님은 황덕호 장로(전 숭의여대 총장, 전 함경남도 도지사)이십니다. 이렇게 대를 잇는 3대 목회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어렸을 적 부모님의 철저한 신앙훈련 아래 학창시절을 보내고 군 시절 육군 장교로 임관 초급 장교 시절, 월남전에 참전(1972-1973) 육군대학 총장 전속부관, 육군본부 예민참모 부장 및 합참 작전국장 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국가에 헌신하고 예편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늦은 40대에 목회를 시작했지만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목회 세월 25년이 눈 깜짝 할 사이에 흘러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빨리 흘러갈 시간이었더라면, 주를 위해 더 충성하며 하나님께 무릎 꿇고 생명을 건 목회를 해보았을 걸 하는 후회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개척의 길을 선택하게 하신 필자에게 많은 시련과 눈물을 흘리게 만드셨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성도를 놓고 남한산성 골짜기에서 매일매일 기도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개척 초기였음에도 제게 세계 선교의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례비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20명 남짓한 성도들은 ‘6Zone 6Teem(6지역 6후원팀)’을 편성하여 선교 후원 사역부터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을 모두 후원 선교사로 임명했고, 중고생 6명을 기수로 임명하여 선교 대상 6개국 깃발을 강대상 국기대에 게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며 사역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는 선교 대회를 개최 했을 때 눈물바다가 됐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선교사역이 교회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되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목회 사역이 활발해질 무렵, 하나님께서 2012년 9월 선친께서 개척하여 세우신 현 새중앙교회에 위임 목사로 부임 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그 해 9월부터 세계 선교의 꿈을 다른 방법으로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캄보디아에 설립한 영광국제학교.


부임 1년도 안 돼서 붙여주신 동역자 이락재 장로님과 캄보디아 선교에 대한 비전을 함께 공유하게 되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기도하는 가운데 장로님의 “캄보디아 비전센터 건립비용 1억 헌납”을 계기로 또 다른 해외 선교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열대 나라, 척박한 땅 캄보디아에 복음을 심고 문맹 퇴치를 위한 학교 설립과 미래의 종합 교육 타운으로 건설해 가는 비전을 품고 캄보디아 우동 지역에 영광국제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맨발로 생활하며 머리도 감지 못하고 사는 열악한 빈민층 아이들이 250원짜리 막대 빵을 받으려 4km를 달려와 말씀을 들으며 바라보는 그들의 눈망울 속에 ‘나도 예수 믿고, 교육 받을 자격이 있어요! 배우고 싶어요’하는 갈망이 비쳐지면서 필자의 마음속에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범벅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더 큰 선교의 큰 꿈을 그리게 하셨고, 코로나가 지속되는 이 시간까지도 성령의 역사는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그 사역은 진행 중에 있습니다. 현재 학생 수는 초·중·고생 500명이며, 50명의 정규 교사가 함께하는 프놈펜 우동 지역의 우수한 학교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2016년 5월에는 영광글로리스쿨 자체 장학생을 선발하여 서울로 초청하는 한국선교방문대회를 개최하여 예배를 통한 영성훈련과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소개하면서 청와대, 경복궁, 전쟁기념관, 롯데타워, KTX 탑승(서울-창원) 해양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그들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주고, 가정의 홈스테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깨달아 알게 하는 꿈의 현장을 실현시켰습니다. 선교대회 후 남기고 간 그들의 체험 간증문은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저의 목회 계획 중 꼭 실현하려고 했던 것은 교회 분위기가 다소 정적이며 지역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던 성도들의 움츠린 마음을 활짝 열고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교회 공동체로 변화시키기 위한 목회 전략을 과감하게 시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넓은 세계를 향한 신앙의 식견과 담대한 믿음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차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통한 훈련은 성도들이 기뻐하는 산교육이 되었습니다. 성지 순례 계획은 다른 교회와 차별화하여 “코스와 테마가 있는 성지 순례”를 시도하였습니다. 성도들 개인에게 사전 성지별 연구 과제를 부여, 자료를 제공하여 예비 탐사하게 하였고, 현지 가이드의 짜인 코스대로의 순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적과 믿음의 선진들의 흔적을 테마 별로 분류하여 성도들에게 기도문, 기행문, 수필, 시, 간증문 등을 작성할 수 있도록 사전 교육을 시킴으로 준비된 용지를 제공하는 등 성지 순례를 마치고 귀국 후 개인별 ‘간증 집회’를 실시하고 ‘성지 순례 은혜 문학’ 전시회를 개최하여 전 성도들의 신앙의 도전과 재무장을 시켜 소극적이던 성도들이 적극적인 성도의 모습으로 전환되어 가는 기쁨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이후 2차 유럽 성지 순례는 “종교개혁 길 위를 걷다”라는 주제로 시작했습니다. 여행사와 성지 순례 계획을 사전 조율하여 순례 코스는 성도들의 의견을 중요시하여 성지의 중요성과 영적도전의 역량을 최대로 고려하여 영적 훈련과 여행의 즐거움을 함께 하는 질 높은 순례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고 목회자의 사전 경험을 바탕으로 현지 가이드의 영성이 넘치는 진행을 통해 은혜 충만한 시간으로 성지 부흥회 형식의 시간을 실행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의 참 뜻과 개혁자들의 신앙고백을 구체적으로 경험 할 수 있었고 뜨거웠던 성지에서 감동과 가슴에 울린 간증을 통한 은혜의 체험은 잊지 못할 성지 순례의 추억이었습니다.

캄보디아 단기 선교에 참여한 성도들.


이 시간 짧은 목회 생활을 뒤돌아보면 시간마다 때마다 일마다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지금도 목회 현장 속에서 나를 바라보시며 나를 만져주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은 역시 나의 힘 되신 여호와이심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젊은 날보다 더 바쁘게, 왕성하게 저를 사용해주고 계십니다.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1:23), “나 바울은 주님의 목사로 만들어졌노라”(I paul made a minister of Lord) 이 말씀에서 내 중심이 떠나지 않는 한 그 은혜에 감사하며 종의 직분을 감당해 나갈 것입니다. 이 길은 바로 저의 선친 고 황하운 목사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이었다고 지금도 고백하며 세 아들 목사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친께서는 젊은 시절 일제의 압박 속에서 1913년 3월 13일 독립만세운동이 경성에서부터 함경도로 확산되자 함경남도 북청의 젊은이들을 주도해서 시위를 벌이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출소 후 고향에 돌아와 보니 가족이 모두 학살당한 뒤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를 통해 울분을 잠재우며 위로를 받던 중 복음을 받아들인 아버지께서는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평양으로 달려가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군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서호교회, 구룡리, 천기리, 내호, 주을 교회 등 13개 교회를 세우는 등 바울 사도의 길을 걸어가시다가 1946년 이북이 공산화되는 과정 속에서 목선을 타고 월남하여 주문진을 경유, 충북 제천에 도착 (현)제천감리교회 2대 담임목사(원로)로 시무한 후 서울로 상경하여 (현)북아현 장로교회를 개척 설립하여 시무하던 중 6.25 전쟁의 발발로 피란을 다녀와 남대문 삼광교회를 개척하시고, 마포구 성산동에 (현)희성교회의 초대 목사로 시무한 후 본 새중앙교회를 설립하시는 등 생애 전체를 교회를 설립하여 복음 전파 사역을 몸소 실천하시다가 1961년 12월 31일 교회 건축 중에 소천 하셨습니다. 이를 귀하게 여겨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여 고인의 뜻을 기렸습니다.

이제 필자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선친 고 황하운 목사님의 목회 신앙을 이어 받아 하나님의 목사로 만들어진 일꾼입니다. 이제 종의 자세로 주님이 맡기신 교회 양 무리를 겸손하여 섬기는 목회 사역을 이어갈 것입니다.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예배와 소그룹이 침체를 보였으나 다시 회복되어 전 성도들이 전면적 대면예배의 열정과 능력이 연일 충만해져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우리교회 역사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허사임을 알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하며 주의 사역을 끝까지 감당할 것입니다. 끝으로 목회 사역 22년의 열매와 흔적, 눈물의 결실을 성도들과 함께 엮어 낸 교회 이야기를 “맑고 밝은 동산의 이야기”, “작은 사랑 큰 소망 이야기” 2권의 책에 실어 올리며 새 역사를 담을 새 광주리 엮음을 준비해 갈 것입니다.


필자 황덕광 목사는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새중앙교회 담임목사이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공동회장 및 서기를 역임하고, 캄보디아국제글로리재단 이사와 (사)세계스포츠선교회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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