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빚 탕감 '한국형 배드뱅크'는 정말 새출발 할 수 있을까 [이호기의 금융형통]

이호기 2022. 8. 1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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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DEEP INSIGHT
자영업자 채무조정 위한 '새출발기금' 10월 가동
30兆 기금 조성해 대출원금의 최대 90% 감면
개인당 한도 25억에 대상자만 300만명 넘을 듯
과거처럼 금융사 팔비틀기·시장교란 되풀이 우려
정부도 "기존보다 감면율 높다" 도덕적 해이 조장
금융권 등 우려 불식시킬 정교한 정책설계 내놔야

정부가 오는 10월부터 코로나19 사태로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 및 소상공인의 빚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채무조정 프로그램 ‘새출발기금’을 본격 가동한다. 30조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코로나19로 손해를 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대출 원금의 최대 90%를 감면해주는 게 골자다. 윤석열 정부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논의한 자영업자 지원을 위한 핵심 정책 가운데 하나다.

일러스트=추덕영/신택수 기자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3월 말 ‘175조원+α’ 규모의 파격적인 금융 지원책을 마련해 시행했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소상공인에 대해 일괄적으로 대출 만기를 연장하고 원리금 상환을 유예해줬다. 당초 6개월 한시적으로 시행하려던 이 조치는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무려 2년6개월 동안 지속됐고 관련 대출 잔액은 133조원까지 불어났다. 이를 포함한 개인사업자 대출은 1000조원에 육박하고 여러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린 다중채무 자영업자도 30만 명(대출 187조8000억원)에 달한다.

다음달 말 코로나19 대출 만기 연장과 상환 유예 프로그램이 종료되면 그동안 누적된 부실이 한꺼번에 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새출발기금이 때맞춰 출범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영업자 대출 가운데 부실 우려가 높은 채권을 미리 솎아내 ‘배드뱅크’에 집중시킴으로써 정상 채권 및 다른 금융사로의 위기 전이를 최대한 막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에 따른 손실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재원 조달 방안)와 향후 시행 과정에서 불거질 수밖에 없는 도덕적 해이 등을 놓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과거에도 각종 금융사고나 위기가 터질 때마다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했는데, 그때마다 ‘금융회사 팔 비틀기’ 논란과 시장 질서 교란 비판은 단골 메뉴처럼 등장했다. 새출발기금도 10월 출범하기 전까지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세밀한 정책 설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배드뱅크 시초는

배드뱅크의 시초는 1980년대 미국 저축대부조합(S&Ls·Savings&Loans) 파산 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최대 저축대부조합이던 ‘아메리칸세이빙스뱅크(ASB)’는 1970년대 경기 호황을 타고 주택담보대출을 크게 늘렸다가 1980년대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서 대규모 부실을 떠안게 됐다. ASB의 자본 잠식 규모는 당시 총자산(300억달러)의 10%가량인 30억달러에 달했다. 이때 미국 예금보험공사(FDIC)와 사모펀드인 텍사스퍼시픽그룹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텍사스퍼시픽그룹은 FDIC의 지원 아래 ASB를 3억5000만달러에 인수한 뒤 자산·부채를 ‘굿뱅크’(자산 76억달러·부채 150억5000만달러)와 ‘배드뱅크’(219억달러·144억달러)로 나눴다. 굿뱅크는 우량 자산과 저비용 부채로 구성됐고, 반대로 배드뱅크는 부실 자산과 고비용 부채로 이뤄졌다. 굿뱅크의 자산·부채 차이는 배드뱅크가 향후 지급을 약속한 ‘부실자산매각어음’(78억달러)과 텍사스퍼시픽그룹의 출자금(3억5000만달러)으로 채워졌다.

그 결과 굿뱅크의 영업은 빠르게 정상화됐다. 1년 만에 자기자본이익률(ROE) 61%를 달성했고 자기자본은 1995년 이전의 네 배에 육박하는 12억달러로 늘었다. 배드뱅크도 모기지담보부채권(MBS) 등 악성 자산을 내다 팔고 동시에 고금리 예금과 차입금을 상환했다. 악성 자산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시장 원리를 적용했다. 배드뱅크의 자산 매각을 위탁받은 아메리칸부동산그룹(AREG)은 처분 이익에 따라 정해진 인센티브를 받았다. 처분 손실은 정부가 모두 부담했다. 시장 기능이 활발하게 작동하면서 투입 예산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배드뱅크의 부실 자산은 1년6개월 만에 219억달러에서 41억달러로 줄었다.

 한국형 배드뱅크의 역사

ASB의 성공 사례를 목격한 해외 여러 나라가 크고 작은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모델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줄도산한 대기업 및 은행의 부실 자산을 사들이기 위해 은행 종금사 등 민간 금융회사와 공공기관 출연금을 합쳐 33조원 규모의 ‘부실채권정리기금’이 마련됐다. 부실 자산 매입 및 매각 등 운영은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가 맡았다. 2013년 2월 청산 때까지 111조6497억원(액면가)의 부실 채권을 매입하는 데 39조2211억원을 썼고 이를 되팔아 46조7150억원을 회수했다. 매입가 기준으로는 119.1%, 액면가 기준으로도 41.8%에 달하는 회수율을 기록했다. 이를 위해 국제 입찰,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 자산관리회사(AMC)와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CRC) 설립 등 다양한 금융 기법이 동원됐다.

두 번째 배드뱅크는 역시 캠코 주도로 설립된 ‘한마음금융’이다. 2003년 ‘카드 대란’으로 신용불량자들이 양산됐고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하자 당시 노무현 정부는 이들의 신용 회복을 돕기 위해 배드뱅크를 세웠다. 캠코 산하에 대부업 인가를 받아 탄생한 한마음금융은 18만4000여 명이 진 빚(액면가 2조원)을 인수해 최장 10년간 장기 분할 상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연체 이자 등은 감면해줬지만 원금 탕감은 없었다. 그럼에도 2020년 9월 청산 때까지 누적 회수율은 63.4%에 그쳤다. 손실은 한마음금융의 주주로 참여한 카드사 증권사 등 500여 개 민간 금융사가 분담했다.

카드 대란의 골이 워낙 깊었던 만큼 한마음금융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노무현 정부는 2005년 2차 배드뱅크인 ‘희망모아’를 띄웠다. 희망모아는 상법상 주식회사였던 한마음금융과 달리 자산유동화법에 따라 유동화전문회사(유한회사)로 설립됐다. 희망모아는 채무조정 대상자에게 한마음금융보다 훨씬 파격적인 혜택을 줬다. 약 126만 명의 빚 13조1000억원(액면가)을 인수해 원금의 30%를 탕감하고, 남은 금액을 최장 8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도록 했다. 한마음금융과 동일한 시기인 2020년 9월 청산 때까지 누적 회수율은 고작 21.2%에 불과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도 금융소외자 지원과 가계부채 해소 등의 명분을 내세워 잇달아 배드뱅크를 세웠다.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8월 설립된 ‘신용회복기금’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크게 높아진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해 대부업체 등 연 30% 이상 고금리 사채에 의존하는 금융소외자 지원이 주된 정책 목표였다. 이들을 대상으로 원금의 최대 30%를 감면하고 최장 8년간 분할 상환하도록 했다.

박근혜 정부도 이 같은 신용회복기금을 확대 개편해 2013년 3월 ‘국민행복기금’을 새롭게 조성했다. 6개월 이상 연체자에 대해 대출 원금의 최대 90%를 깎아주고 최장 10년간 분할 상환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다만 신용회복기금과 국민행복기금은 채무조정 한도가 각각 3000만원과 1억원이다 보니 대상자 수(각각 102만 명, 110만 명)에 비해 부실 채권 인수액(7조5000억원, 10조7000억원)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새출발기금의 취지와 설계

새출발기금은 ‘코로나19 피해 자영업자·소상공인에 대한 파격 지원’을 내세운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고안됐다. 그래서 수혜 대상과 지원 규모도 역대급이란 평가다. 캠코가 최근 은행연합회 등에 배포한 설명자료에 따르면 새출발기금을 신청하려면 지난 6월 30일 기준으로 금융회사의 ‘코로나 대출 만기 연장·상환 유예’ 조치를 받고 있거나 소상공인 코로나 재난지원금 또는 손실보상금 등을 받은 이력이 있으면 된다. 이에 따른 대상자 수만 3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대출을 3개월 이상 연체한 사람은 ‘부실 차주’로 분류돼 소득과 재산, 상환 능력 등에 따라 무담보 대출 원금의 60~90%를 감면받을 수 있다.

1인당 채무조정 한도액도 사상 최대다. 개인 자영업자의 한도는 25억원(담보·보증부 15억원, 무담보 10억원), 법인 소상공인은 30억원(담보·보증부 20억원, 무담보 10억원)에 이른다. 이 중 원금 감면은 부실 차주의 무담보 채무에만 적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신용대출로 10억원을 빌려 3개월 이상 연체한 자영업자라면 이론적으로 9억원까지 원금을 탕감받을 수 있는 셈이다. 개인이 아닌 법인까지 감안해 채무조정 상한선을 높였겠지만 수십억원의 빚을 낼 만큼 담보와 신용을 갖춘 사업자가 정부의 금융 지원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향후 불공정 논란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원금 감면 후 남은 대출 잔액에 대한 장기 분할 상환 기간도 역대 어느 배드뱅크보다 긴 편이다. 무담보·보증부 대출은 1년 거치, 최대 10년 분할 상환하고 담보부 대출은 3년 거치, 최대 20년간 나눠 내도록 했다.

 논란과 풀어야 할 과제

이 같은 역대급 규모와 혜택으로 무장한 배드뱅크는 지금껏 없었기 때문에 재원 조달과 도덕적 해이 논란 역시 거셀 수밖에 없다. 정부는 새출발기금 운영 주체인 캠코에 올해 1조1000억원을 출자하고 내년에도 2조5000억원을 투입한다. 정부 예산 지원이 거의 없었던 과거 한마음금융, 희망모아, 신용회복기금, 국민행복기금 등과 대비된다.

그러나 새출발기금의 신청 요건이 그리 까다롭지 않은 데다 대상자 범위가 넓기 때문에 금융회사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직접 대금 추심 등을 통해 회수율을 높일 수 있는 채권도 대상 요건만 충족한다면 새출발기금에 넘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달 전체 금융권 차원에서 체결될 새출발기금 공동협약에 참여하지 않는 방법도 있지만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금융사들에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자영업자 신용대출 비중이 높은 2금융권의 위기감은 더욱 크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금융당국은 그동안 새출발기금에 대해 기존 신용회복 제도보다 원금 감면율이 높다는 식으로 오히려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정책 홍보를 해 왔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정책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동안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빚을 꼬박꼬박 갚아온 자영업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초래하고 각 금융사의 영업 부담만 키우는 꼴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금융위원회는 18일 금융권을 상대로 새출발기금의 구체적인 운영 계획과 향후 일정 등에 대한 설명회를 연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8일 대통령 업무보고를 앞두고 한 언론 브리핑에서 새출발기금의 도덕적 해이 논란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가 있다”며 “앞으로 논의가 진행되면 그런 부분의 문제는 대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공언대로 금융위가 금융권의 우려를 모두 불식시킬 만한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호기 금융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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