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박사의 성경 속 상식/하나님의 선하신 날개 아래

hesedia69@daum.net 2022. 8. 1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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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박사

기독교 성경에서 룻기는 여성이 주인공인 두 권의 책(룻기와 에스더)중 하나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룻기는 잠언 뒤에 위치하는데 (잠언의) 마지막 장엔 ‘현숙한 여인’에 대한 송가가 나온다. 즉 룻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여인’의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사사들이 치리하던 암울한 시대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안으로는 지파 간 갈등으로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숙적 필리스틴인(Philistines)들의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했다. 사사기 마지막 절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21: 25)고 기록한다. 소위 사사 시대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그들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진정한 왕(여호와)이 없는’ 정치, 종교적인 무정부 상태였다. 룻기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은밀히 일하고 계시는지를 잘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룻기의) 마지막 절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21~22)

사사 시대 말기, 흉년을 피해 고향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간 한 가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인 엘리멜렉이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다. 그 후에 두 아들은 모압여자, 룻과 오르바를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그 두 아들마저 자식없이 세상을 등진다. “그 여인(나오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룻 1:5) 두 며느리가 곁에 있었건만 나오미는 세상에 덩그마니 홀로 남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모압으로 이주한 지 십 년 만에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녀는 길 떠날 채비를 하면서 청상과부가 된 두 며느리에게 재혼을 종용한다. 근데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작별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한사코 나오미를 붙좇았다.

룻의 결정은 매우 놀랍다. 나오미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룻 1:13)라고 한탄하는데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고백한다. 그녀는 남편을 통해 홍해 바다에서 보여주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능력의 사건을 전해 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그들에게 결국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을까? 여하튼 룻은 비탄에 빠진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따라나선다. 마침내 룻과 나오미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두 아낙네의 걸음으로 한 사나흘 걸리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서로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어쩌면 별로 할 말이 없었는지 모른다. 성경기자는 두 여인의 귀향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 1:22) 생뚱맞게도 ‘보리추수 시작할 때에’라는 시기를 강조한다. 나오미는 알았을까? 그 보리밭에서 룻은 훗날 결혼하게 될 보아스를 만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때론 쓰라린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분을 신뢰하라!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라! 어두운 밤 구름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이윽고 축복의 비가 되어 당신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들이 고향에 도착했을 때 오랜 가뭄이 해갈되었는지 튼실한 곡식들이 들판에 널려 있었다. 보리 수확이 한창이었다. 룻은 아무 밭에나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우려고 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룻 2:3) 필연이란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온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한편 룻은 밭자락에서 이삭을 줍는 권리마저 당연히 여기지 않았다.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룻 2:7)라고 허락을 구했다. 겸손한 자는 자신이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은혜를 입을수록 더욱 겸손해진다.

때마침 추수를 독려하기 위해 보아스가 밭에 당도한다. 그는 이방 여자인 룻에게 호의를 베푼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룻 2:10) 이는 실로 우리 각자의 삶에서 주님께 드려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닌가?

그러자 보아스는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일을 알고 있었노라면서 이제 이스라엘 하나님의 날개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그녀에게 (그 분께서) 온전한 상 주시길 원한다고 빌었다.(룻 2:12) 여기서 상이란 우리의 행위와 공로에 의한 보상이 아닌,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참 기쁨과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자 동시에 그 분의 인자하심을 안전한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은총을 뜻한다.

흥미롭게도 그가 기원한 ‘하나님의 날개’ 밑에서의 보호는 (바로) 보아스 자신의 책임있는 행동에 의해 곧 실현될 바였다. 나오미가 시킨 대로 한밤중 룻이 보아스를 찾아가서 그 발치에 누워있다가 잠을 자던 그가 깨어났을 때에 (그녀는) 그에게 말하길, “당신의 옷자락을 펴 여종을 덮으소서”(룻 3:9)라고 간청하였다. -본문의 그 ‘옷자락’과 그 ‘날개’는 동일한 히브리어 ‘카나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옷자락으로 자기를 덮으라는 의미는 청혼을 가리킨다. 이른바 보아스의 옷자락이 하나님의 날개였다. 구약에서 -‘날개를 펴다’라는 표현과 관련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아내 삼으신 젊은 처녀로 묘사하면서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내 날개를 네 위에 펴서)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겔 16:8)고 말씀하신 구절이 있다. 쌍방간 신실한 결혼서약을 일컫는다.

룻기는 한 편의 드라마틱한 문예작품과도 같다. 삶의 잇따른 고난으로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21)고 탄식한 나오미가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에 의해 자부인 룻과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를 통해 (다시) 그녀인생이 풍성하게 채움을 받는 놀라운 반전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의 통곡을 춤으로 바뀌게 하였을까? 우선, 룻은 곤고한 시어머니를 한결같이 사랑하였다. 그녀는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나오미도 젊은 룻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훌륭한 배우자를 물색했다.(룻 3:1~2) -아마 가문의 상속자를 위해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향기로운 인격의 룻이 험한 세상에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애를 썼다. 더 나아가 그는 그녀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려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감당하였다. 그처럼 서로 동정과 인애의 심정으로 따뜻이 품어주려고 노력했기에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속담에 하나님은 굽은 막대기로도 똑바른 선을 그으신다고 하신다. (당시)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사회에서 이방여인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일종의 특종기사에 해당됐다. 말인즉 그들이 상종을 꺼리는 모압 출신 여성이, 그것도 한 번 결혼해 10년간 아기를 낳지못한 여자가 뭇사람에게 존경받는 유력자 보아스와 재혼해서 ‘나오미의 아들’이라 칭하는 아기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부언하자면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 했는데 그는 다윗 왕가의 조상으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hesedia6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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