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지향 달라도.. 도합 294세 모녀들이 여행을 떠났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경아 기자]
▲ 오래 살기 싫은디 나이를 합쳐 294세인 네 모녀 여행단의 삼박사일 리포트입니다. |
ⓒ 정경아 |
네 모녀 여행단 출발!
되도록 외식을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각자 음식 준비를 했다. 살림 고수인 언니는 조기감자조림, 홍어 무침에다 불고기를 재워왔다. 친정엄마의 취향 저격 메뉴다. 막내는 동네 맛집에서 꼬리곰탕을 포장해 왔다. 갓김치, 부추김치, 장조림까지 가져왔다. 셋 중 가장 건달인 나는 달랑 깻잎김치랑 명란젓갈만 챙겼다.
네 모녀 여행단의 운전을 도맡은 건 막내. 코로나19 발생 이후 일본어 여행 가이드 경력을 접은 그녀다. 공주 무령왕릉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 한산모시박물관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해박한 배경지식뿐 아니라 동선이나 무더위 속 체력 안배 등, 전문 가이드의 섬세한 관리를 체험한 일정이 됐다.
잠깐 만나는 점심이 아니라 삼시세끼 밥상에 날마다 함께 앉게 된 건 얼마 만인가. 가져온 음식을 서로 칭찬하고 덧버선이나 선크림 같은 자잘한 선물들을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중 최고로 맛있는 건 잠들기 전의 수다 한 판!
언니가 형부 흉을 본다. 퇴직 후 옛 직장 사교계를 거의 끊은 때문일까. 형부는 밥상머리에서 끝없이 국내 정치 이야기를 하는 두통 유발자가 됐단다. 나는 남편이 어질러대기 대마왕이라고 험담한다. 막내는 제부가 걸핏하면 삐친다고 고발한다. 셋은 마치 수학여행 온 여학생들처럼 떠들어댄다. 급기야 엄마 길례씨가 "시끄럽다. 빨리들 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신다. 청각장애가 심한 엄마가 시끄럽다고 하시다니! 불빛 때문에 잠들기 힘드셨던 거다. 우린 킥킥댄다. 어릴 적 이불 속 네 자매 시절과 똑같다.
제각각 결혼으로 헤어지기 전까지 자매들이 함께 공유한 기억의 총량은 실로 방대하다. 고향 나주의 옛집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집 풍경은 모두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아버지와 엄마의 격렬한 부부싸움이 있던 밤, 어린 5남매가 대숲 속 외갓집으로 한 시간을 걸어 대피하던 기억마저 이젠 달콤하다.
사춘기 아들을 둔 막내의 지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 자매들은 시샘하고 경쟁했다. 학교 성적뿐 아니라 엄마 심부름이나 동생 돌보기 분야에서 맏이인 언니와 난 경쟁자였다. 게다가 연년생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 대신 이름으로 마구 불러댔던 나다. 엄마아빠가 큰딸을 부르는 대로 따라 불렀던 건방진 여동생을 쥐어박고 싶었을 언니! 발랄이 지나쳐 제멋대로였던 나 때문에 착하고 조신한 맏딸은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터다.
지난 시간의 간격을 넘어 마주 앉은 우리들.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자매들은 각각 두 아이를 낳고 키웠다. 너나없이 한 번 이상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말할 수 없는 각자의 아픔이 어찌 없을까. 그 시간을 넘어온 이제 언니를, 여동생을 그저 애틋하고 기특하게 바라본다.
전직 국어 교사인 언니는 8년째 황혼 육아 중이다. 초딩 2학년 외손녀에겐 이야기보따리 할머니다. 옛날이야기를 수집하고 편집해 들려준다. 이야기를 듣고 난 손녀가 할머니에게 다시 그 이야기를 들려주게끔 한다. 집중력 강화를 위해 고안한 방식. 어느덧 손녀는 어린 양을 소재로 추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나.
막내네 큰아들은 중딩 시절 가출했다. 이틀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지 않자 막내는 겁이 났다. 전화나 문자 메시지에도 응답이 없었다. 막내는 문자를 보냈다. "아들, 도와줘!" 한참 만에 답장이 왔다. "무슨 일인데?" 막내는 둘러댔다. "급한 서류가 있는데 프린터가 고장이야. 인쇄가 안 돼. 빨리 와서 도와줘." 곧장 답장이 왔다. "한 시간 내에 집 도착할게."
막내는 부랴부랴 프린터 코드를 뽑고, 컴퓨터 속을 더듬더듬 헝클어놨다. 돌아온 아들은 30분 만에 컴퓨터와 프린터를 말쑥하게 세팅해냈다. 막내는 "너 없으면 엄마는 못 살 거야." 너스레를 떨며 아들이 좋아하는 고기 밥상을 차렸다. 야단을 맞는 대신 엄마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낸 아들, 떳떳하게 밥상에 앉아 맛나게 먹었다.
다시 집을 나가야 하나? 아들의 표정이 어정쩡해진 바로 그 순간, 막내는 아들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빨리 샤워하고 한숨 자라." 집 떠나 이틀간 동네 공원 화장실에서 새우잠을 잤다던 녀석은 샤워를 마치고 금방 잠이 들었다. 가출 소동의 끝이었다.
언니와 난 막내의 지혜를 칭송했다. 가출한 중딩에게 집에 돌아올 명분을 주는 동시에 아들을 믿고 의지한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막내, 존경스럽다. 사춘기 아들딸을 둔 엄마가 제일 신경 써야 할 부분은 화를 내지 않고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아니던가.
자매의 인연이란 무엇일까?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를 겸한 일본어 가이드였기에 상황 대처능력이 뛰어났던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일본인 여행단과 한국인 여행단을 고루 이끌며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을 겪어냈던 그녀, 몇 해 전, 아빠를 따라 일본에 온 소년이 버스 투어 중 호흡 곤란으로 질식 위기에 처했단다.
막내는 서울에 있는 소년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년에게는 메밀국수 알레르기가 있었다. 점심에 나온 메밀국수가 문제였던 것. 즉시 앰뷸런스를 호출, 응급실로 후송해 어린 고객을 지켜냈다. 막내는 가이드 생활로 자신의 사고방식이 말랑말랑해졌다고 말한다. 요즘은 전문 가이드 경험을 실은 책 출간을 준비 중이다.
자매들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서로의 정치적 지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정치적 신념을 바꾸려 애쓰지 않는다. 상대방의 행동을 섣불리 판단할 생각이 없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서로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의 아이들, 즉 사촌들이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매들은 그들의 우애를 키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명절 모임이나 기념일이면 녀석들에게 선물이나 촌지를 건넨다. 이삿날 모여 짜장면 먹기 이벤트도 기획한다. 그 덕분일까. 내 아이들과 조카들은 그럭저럭 왕래가 잦다. 가끔 모여 삼겹살도 먹고 생일 축하로 커피나 치킨 쿠폰을 주고받는 모양이니.
자매의 인연이란 무엇일까? 그녀들은 내가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주 오래 전 얼마나 찌질하고 괴팍했는지, 어떤 일에 웃고 울었던지를 기억해 주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내게 갈수록 소중한 이유다.
엄마가 우리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신다. "너희들이 모두 웃고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고맙고 또 고맙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