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곤 칼럼] 정권 초, YS의 성공 MB의 실패

고현곤 2022. 8. 16.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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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정권 초 대단했던 대통령은 단연 YS(김영삼)다. 개혁이 거침없었다. 그렇다고 칼을 막 휘두른 건 아니었다. 민심을 치밀하게 저울질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에 나섰다. 취임 사흘 만인 1993년 2월 27일. YS는 자신의 재산을 가장 먼저 공개했다. 총 17억7800만원. ‘부패와의 전쟁’과 ‘도덕성 회복’을 내세웠다. 고위 공직자들이 재산공개에 반발했다. 여당 의원 6명이 사퇴·제명·탈당했다. 하지만 명분이 뚜렷하고, 대통령이 1호로 공개했으니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공직자 재산공개를 의무화한 법안이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국민은 열광했다.

93년 3월 8일. YS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다.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 해체의 신호탄이었다. 석 달 동안 하나회 출신 장군 18명이 옷을 벗었다. 하나회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손 봐야 한다’는 전 국민 공감대가 있었다. YS는 여론의 판세를 꿰뚫었다. 전광석화처럼 하나회를 제거했다. 즉흥적 조치는 아니었다. 훗날 회고록에 “군사정권 시절부터 군 내부를 들여다봤다. 대통령 후보 때는 군의 숙정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방법을 구상했다”고 썼다. 그해 4월 여론조사에서 10대 청소년이 가장 좋아한 인물은 연예인이 아닌 YS였다. 국민은 군사정권의 오랜 그늘에서 벗어나 문민시대를 만끽했다.

「 YS, 재산공개·하나회 척결·실명제
MB, 쇠고기협상·대운하·영어몰입
공감대·명분 있느냐가 성패 갈라
윤 대통령, MB 전철 밟는 건 아닌지

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가 시행됐다. 박정희 정부 이후 수차례 논의된 과제였다. 경제에 미칠 파장과 반발 때문에 미뤄지고 있었다. 가·차명 자금이 총통화의 3분의 1에 달할 정도로 만연했다. YS는 금융실명제가 ‘검은돈 척결’이라는 시대정신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집권 후반기에는 더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금융거래 관행을 뿌리 뽑는 것이어서 기득권층의 반발이 거셌다. 영세업자가 피해를 보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YS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금융실명제는 그의 대표 업적으로 기억된다. 선진국으로 가려면 언젠가,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명분에서 이기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YS 정권 초 세 가지 성공 사례는 특징이 있다. 대통령이 앞장섰다. 전 국민 공감대가 있었다. 꼭 해야 한다는 명분이 뚜렷했다. 이런 게 없으면 정권 초라도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힘을 과신하고 섣부르게 움직이다간 낭패를 본다. 이명박(MB) 정부의 한·미 쇠고기 협상이 대표적이다. 원래 쇠고기 협상은 노무현 정부가 시작한 것이다. 미국과 여러 차례 타결을 약속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차기 정부에 떠넘겼다. MB는 취임 50여 일 만인 2008년 4월 18일 쇠고기 협상을 타결했다.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타결이 늦춰지면서) 실추된 대외신인도를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패착이었다. 타결을 미루더라도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정권 초, 성과를 내려고 서두르다가 불순세력이 파놓은 광우병 함정에 걸려들었다.

MB는 국민이 공감하지 않는 일을 벌이다가 점수를 까먹고 있었다. 영어몰입 교육은 학부모의 속을 긁었다. 0교시와 심야 보충수업 강행으로 학생들이 반발했다. 한반도 대운하를 굳이 해야 하는지 국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광우병 사태로 결정타를 맞은 MB는 ‘동반성장’과 ‘친서민 중도’로 급선회했다. 또 패착이었다. MB가 잘할 수 있는 실용·규제개혁을 놓쳤고, 동반성장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YS와 MB는 비슷한 데가 많았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일 중독이었다. YS는 새벽 5시 어김없이 기상해 4㎞를 조깅했다. 신문을 훑어본 뒤 7시30분이면 누군가와 아침식사를 하며 국정을 얘기했다. MB 참모들은 “수시로 걸려오는 대통령 전화를 못 받을까 봐 샤워할 때도 휴대폰을 옆에 뒀다”고 회상했다. 둘 다 치열하게 일했는데, 취임 100일 지지율은 YS 83%, MB 21%로 극명하게 갈렸다. 어디서 차이가 났을까? 전 국민이 공감하고 명분이 뚜렷한 개혁 대상을 골라내는 안목의 차이였다. 어느 시점에, 어떤 것을 할지 말지 판단하는 정무감각의 차이였다. 정치 9단이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취임 100일을 맞는다. 지금까진 MB와 닮았다. 안목과 정무감각에 약점을 드러내며 점수를 많이 잃었다. 너무 쉽게 결정한다. ‘독단적’이란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부터 만 5세 입학까지 쭉 그랬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의문이 든다. 왜 하필 지금?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중차대한 사안을 대통령과 장관, 둘이 앉아 결정하는 모습도 보기 좋지 않다. 국민을 무시한단 인상을 준다. 불과 100일 만에 여성(여성가족부 폐지), 경찰(경찰국 신설), 호남·비(非)엘리트(편중 인사), 학부모(만 5세 입학), 이대남(이준석 축출)과 틈이 생겼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 전체와 싸우는 셈이다. 공감대도, 명분도, 승산도 없는 딱한 싸움을 하는 것이다.

광우병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2008년 6월 19일, MB의 기자회견을 곱씹어보기 바란다. “아무리 시급한 국가적 현안이라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챙겨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도 참고할 만하다. ‘천천히 서둘러라.’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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