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의 이코노믹스] '칩4' 논의 참여해야 '안미경중' 이후 한국 살 길 찾는다

2022. 8. 16.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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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사이에 낀 한국 반도체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치열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바람은 계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유례없던 폭염과 폭우가 교차하던 여름도 가을에 자리를 물려줄 채비를 하고 있다. 여름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6월 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는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오랜 군사적 중립을 깨고 NATO에 가입을 선언한 스웨덴과 핀란드, 그리고 태평양의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가 참석했다.

북대서양 국가들의 집단안보체제에 태평양 국가들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드리드 정상회의에 초대받은 태평양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미국과의 전통적 동맹국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NATO는 신규 가입국과 초청한 태평양 국가들이 보는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도전’으로 규정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침공’이라고 비난하지 않은 중국, 주권국가의 영토를 폭력적인 수단으로 강탈하려는 명백한 범죄행위에 눈감은 중국에 대해 NATO는 공개적으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고 전 세계에 선언한 셈이다.

「 기술·장비 가진 미국이 반도체 주도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필연적 결과
안미경중은 미·중 대립 이후 불가능
칩4 논의 빠지면 한국 더 불리해져

미·유럽 갈라놓는 중국의 삼분지계 깨져

이코노믹스

NATO의 ‘새로운 전략개념’은 중국의 계산을 흔들리게 만든다. 트럼프-시진핑시대 미·중 갈등이 본격화될 때, 중국의 계산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였다.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관세폭탄을 투척하고 중국기업들을 정조준해서 압박하더라도, 유럽이 미국 편에 서지 않는다면 미국과의 게임은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중국이 그간 공을 들여온 유럽 가르기. 다른 하나는 트럼프의 일방주의. 중국은 2012년부터 헝가리·폴란드·체코 등 중부유럽, 동부유럽 16개국을 상대로 관계개선에 엄청 노력을 쏟아 왔다.

‘16+1’ 정상회의를 발족시켜 물류·인프라·에너지 분야에서의 중국 투자확대의 명분을 확보했다. 이들 국가에서의 중국투자가 증가하는 만큼, 유럽에서의 중국의 그림자도 커져갔다. 트럼프의 미국이 중국을 무역으로 압박해도 유럽연합(EU)이 마냥 환호작약할 수 없는 구조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배양되었다. 게다가 트럼프는 EU를 주도하는 독일·프랑스의 협조를 구하기는커녕, 거친 말들로 유럽과의 관계 악화를 자초했다. 남들은 말로 천냥 빚도 갚는다는데. 그래서 미·중 무역 전쟁이 패권경쟁으로 치달아도 유럽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한, 중국은 ‘롱 게임(long game, 지구전)’을 구사할 수 있었다.

중국이 러시아 편들자 미·유럽 협력 나서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러시아 편들기는 그간 실리와 명분 사이에서 좌고우면해 오던 유럽을 중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미·중 패권경쟁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을 대체하는 패권국가가 되려는 중국의 천하삼분지계 구도가 헝클어졌다.

6월 마드리드 NATO 정상회의는 훗날 역사에서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 현장에 21세기 새로운 통상대국으로 등장한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것 역시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그 역사적 현장에서 정부 고위 당국자는 “중국을 통한 수출호황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중국의 대안시장이 필요하다.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의미하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시대는 끝나고 있는가. 미·중 패권경쟁이 본격화된 이후,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안미경중 시대의 종언을 꺼낸 것은 처음이다. 여전히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상대국이다. 그렇다면 안미경중의 종언은 한국의 전략변화를 의미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안미경중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다. 미국이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미국이 주도하던 국제질서에 중국을 포용한 것은 중국의 변화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중국이 빈곤에서 탈출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정치와 제도가 서구적인 글로벌스탠더드로 변화할 것이라는 미국의 기대는 ‘꿈’으로 끝났다. 중국이 독일과 일본을 연달아 제치고 경제 규모 2위의 대국으로 부상한 후, 세계는 중국이 책임 있는 대국으로 나서 주길 기대했다.

자유무역 질서의 최대수혜자로 주요 2개국(G2)으로까지 등극한 중국이 미국과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명백해졌다. 중국의 꿈이 미국의 꿈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미국이 중국 견제를 본격화하자, 그 파장은 그동안 안미경중의 패러다임 속에 안주하던 국가들에게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한국도 예외일 리 없다. 아직도 안미경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거나 종교적 편집광임이 분명하다. 지난 수십 년을 지탱해 온 안미경중 패러다임 분열의 단층선 위에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가 있다.

통상전문가들 “중국의 보복 우려 지나쳐”

지난주 강릉에서 한국경제학회 정책심포지엄이 열렸다. 경제안보시대, 한국의 통상정책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화두는 ‘칩4(Chip four)’였다. 미국이 한국·일본·대만과 함께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국내 언론에선 연일 “중국이 보복할 것이다, 아니다”라는 식의 추측성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은 한국만 콕 집어, “반중국 대열에 서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강릉에 모인 통상전문가들은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지 한목소리로 걱정과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우선,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의 탄력성을 확보하기 위한 논의체가 발족될 예정이다. 반도체 기술과 장비에 주도권을 가진 미국이 소재·제조 분야에 핵심역량을 가진 한국·일본·대만에 참여를 요청했다. 배타적인 동맹으로 발전할지, 어떤 국가가 최종 참여할지,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연구개발·인력 등 의제가 올라와 있지만, 범위가 더 늘어날 수 있다. 그런 논의를 위한 회의가 여름의 끝자락에 열린다. 여기까지가 칩4에 관해 전문가들 사이에 확인된 사실이다.

트럼프를 제치고 바이든이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직후, 그의 첫번째 주문은 주요 제품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방안을 모색하라는 지시였다. 디지털 대전환과 팬데믹 시대의 중첩 속에 미·중 경쟁이 가속화하면서 핵심 전략물자로 등장한 반도체·배터리·의약품·희토류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방안은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합해서 공급망을 재구축하는 것’이라는 결론의 보고서가 바이든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질 때, ‘민주주의 기술동맹’의 탄생은 예정된 수순(최병일의 이코노믹스, 2021년 6월1일 자)이었다.

칩4에서 중국 불공정 행위 함께 논의해야

미리 지레짐작으로 중국의 보복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 만약 칩4가 동맹으로 발전한다면, 동맹국들은 집단적으로 외부의 보복과 도발에 대응하게 될 것이다. 어떤 형태로 칩4가 발전하더라도 중국발 리스크에 대한 집단 대응전략 모색이라는 의도를 감출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 의도가 중국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명백백하게 전달되어, 중국 스스로 중국 리스크를 줄이는 노력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안미경중 패러다임과 작별하지 못하던 시절, 기술탈취와 외국기업에 대한 자의적 차별, 불공정 행위 등 중국 리스크는 애써 외면되거나 감내해야 했다.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칩4는 시작일 수 있다. 유럽까지 가세한 칩도 가능하다.

중국의 보복을 걱정하는 만큼, 미국의 보복에도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현명하다. 최근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반도체 법안은 미국에 투자한 외국기업이 보조금을 받게 되는 경우, 향후 10년간 중국에서의 신규투자·증설 등을 금지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에 모두 대규모 투자를 했거나 계획하고 있는 한국기업들은 진퇴양난의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상황은 시스템 반도체의 강자인 대만도 같은 상황이다.

칩4에 참여하지 않고 중국발 리스크, 미국발 리스크를 협상할 수 있을까? 한국이 배제된 상황에서 다른 국가들이 경기규칙을 정한다면, 한국은 스스로의 강점을 부각시킬 기회도,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도 모두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다. 반도체는 통상대국 한국의 주력산업이다. 신냉전시대의 도래에 안정적·탄력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은 미국만을 위한 과제가 아니다.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다. 공급망의 안정성 확보를 위협하는 기술탈취·인력탈취·수출금지 행위는 경제안보를 위협한다. 칩4 참여는 그런 원칙을 집단적으로 천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새로운 바람이 분다.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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