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월세로 갈 데 없어".. 젖은 반지하에 텐트 친 주민들

이의재,성윤수 입력 2022. 8. 16. 00:04 수정 2022. 8. 1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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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 젖은 방에 다시 몸 눕히는 반지하 세입자들
15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다세대주택에서 집주인이 반지하 세입자 방을 정리하던 중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해당 방의 세입자는 지난 8일 기록적인 폭우로 침수 피해를 입은 뒤 텐트를 설치한 채 지내고 있다. 최현규 기자


서울에 하루 최대 380㎜의 물 폭탄이 쏟아진 지 1주일이 흐른 15일. 침수 피해가 집중된 서울 관악·동작구 반지하 주택 곳곳은 주인을 잃은 집기가 한데 뒤엉킨 채 방치돼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물기와 악취가 가득한 방을 떠날 수 없는 이들도 많다. 반지하 월세로는 새 보금자리를 찾기 어려운 세입자들은 달리 갈 곳이 없어 여전히 축축한 방 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날 찾은 동작구 상도동 성대전통시장 인근 반지하층 방 안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크기의 파란색 텐트가 설치돼 있었다. 지난 8일 내린 폭우로 허리 높이까지 흙탕물이 차올랐던 일용직 노동자 이모(59)씨 방이다. 물을 전부 퍼내고 침수된 벽지와 장판을 들어냈지만 물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그는 할 수 없이 방 안에 텐트를 쳤다. 다용도 수납함을 식탁으로, 간이 매트를 의자로 두고 식사를 한다. 조리 도구 역시 전부 침수돼 이날 저녁은 밖에서 사온 떡볶이를 ‘수납함 식탁’에 두고 끼니를 때웠다.

20년을 이 방에서 살아온 이씨는 2010년 9월 폭우 때도 자던 중 범람한 물이 차오른 집에 갇힐 뻔한 경험이 있다. 두 번의 물난리를 겪었지만 이씨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그는 집주인이 사정을 봐준 덕에 전기세 포함, 월 19만원을 내고 이곳에서 생활한다. 지병이 있고 나이가 많아 일감을 자주 받지 못하는 이씨에게 20만원이 넘는 주거비는 부담스럽다. 인근의 월세는 방 하나짜리 반지하층 매물이 월 30만원 정도여서 지금의 방이 동네에서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한다. 이씨는 “고시원도 여기보다 비싸기 때문에 여길 나가면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언제 다시 내릴지 모를 폭우가 두렵지만 임시대피소는 가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19 감염 걱정도 있고, 제대로 씻을 수 없는 등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오면 또 집이 잠길 것 같아 겁나요. (집주인이) 조치를 해줬으면 좋겠지만 지금 내가 뭘 바랄 만한 처지는 아니지요.”

반지하층 가구가 밀집한 관악구 신사동 일대에도 젖은 집기 사이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김모(73)씨 집은 이날 오후까지 숨도 못 쉴 정도의 악취가 가시지 않았다. 침수 당시 정화조에서 넘친 물이 집안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물을 빼내고 장판을 뜯어냈지만 방 안엔 여전히 바닥 깊은 곳에 스며든 물이 악취와 함께 배어나고 있었다.

김씨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만 옮길 곳이 없다. 김씨는 보증금 8000만원에 월 20만원을 내는 반전세 형태로 이곳에서 거주 중이다. 별다른 직업 없이 월 30만원의 국민연금으로 생활하는 김씨에게 지상층으로의 이사는 꿈 같은 얘기다. 김씨는 “폭우를 겪고 나니 무조건 2층 이상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우리 같은 노인에게 그만한 돈이 어디 있겠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집중호우로 참변을 당한 발달장애 가족이 거주하던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방 창문 앞에 지난 12일 조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인근 반지하에 거주하는 50대 김모씨도 이날 물에 잠긴 매트리스를 선풍기로 말리고 있었다. 김씨는 지난 며칠을 여관에서 보냈지만 하루 5만원의 숙박비가 부담스러워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누가 이런 곳에서 살고 싶겠느냐”면서도 “여기 집값으로 이사는 꿈도 못 꾼다”고 했다.

떠나는 것도 쉽지 않다. 반지하 세대의 침수 피해가 집중되면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한 집주인이 보증금 반환을 거부해 갈등을 빚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14일 관악구 신림동 한 빌라촌에선 “보증금을 받아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세입자와 “계약기간이 남았는데 갑자기 보증금을 돌려 달라면 어떻게 하냐”는 집주인 사이 다툼이 목격됐다.

며칠 전 반지하층 세입자에게서 나가겠다는 통보를 받은 동작구 한 집주인은 “침수된 동네라고 소문이 다 났는데 누가 새로 들어오려고 하겠느냐”며 “수백만원대의 목돈을 갑자기 주려면 나도 빌려서 마련해야 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침수 가구에 지급되는 재난지원금을 두고도 이사를 나가려는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실거주하는 세입자가 지급 대상이지만 집 수리 명목으로 지급되는 돈이어서 수리비 부담 주체에 따라 애매해진다. 세입자가 지원금을 수령해 이사를 나가면 집주인이 수리비를 혼자 부담해야 한다는 이유로 보증금 반환을 거부하며 이사를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신림동의 한 주민은 “세입자가 이사를 나가면 재난지원금을 어떻게 나눌지 애매해진다”며 “다투는 경우가 많아서 동 주민센터에서도 ‘세입자와 집주인이 같이 오라’고 안내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의재 성윤수 기자 sentin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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