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400채 값으로 일본에서 되찾아온 보물
[임영열 기자]
▲ 국보 청자 상감 운학문매병. 고려시대(12세기).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 몸통 전면에는 구름과 학을 새겨 넣었다. 일본인 도굴꾼이 강화도에 있는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의 무덤에서 도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5년 간송 전형필이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 당시 기와집 20채 값으로 인수했다. |
ⓒ 문화재청 |
청자의 소유자는 마에다 사이이치로. 일본 골동품상이었다. 제시한 가격은 2만 원. 당시 서울에서 쓸만한 기와집 한 채 값이 천 원 가량이었으니 도자기 한 점이 기와집 20채와 맞먹는 가격이었다. 워낙 가격이 높은 탓에 총독부 박물관에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 문화재 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 |
ⓒ 간송 미술관 |
뒤늦게 소식을 접한 오사카의 대수장가 무라카미가 일본에서 급히 건너왔다. 구입한 가격의 두 배인 4만 원을 줄 테니 되팔라고 했다. 청년은 "양보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보다 더 뛰어난 청자를 가지고 오신다면 2만 원에 그대로 드리겠습니다"라며 정중하게 그의 청을 거절했다. 청년의 의지를 꺾지 못한 무라카미는 "조선 제일의 수장가가 되십시오"라는 덕담과 함께 쓸쓸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쯤 하면, 우리 문화유산에 아무리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청년이 누구인지 짐작했을 것이다. 맞다. 이 사람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문화재 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 선생이다.
▲ 도쿄 와세다 대학시절의 간송 전형필. |
ⓒ 간송미술관 |
간송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현재 종로 4가인 배오개의 상권은 물론이며 왕십리 등 서울 일대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 충남 공주 등지의 농지를 소유한 십만 석 지기 대부호였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간송은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만 열네 살 때 양부였던 작은아버지와 형을 잃고 슬픔과 혼돈의 시간을 보낸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간송은 외종 사촌이었던 월탄 박종화가 다녔던 휘문고보에 진학한다. 여기에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스승 춘곡 고희동과 독립운동가이면서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을 만나 우리 역사·문화·예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지어준다. '산골짜기의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다.
▲ 위창 오세창과 전형필, 위창은 전형필에게 우리 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간송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
ⓒ 간송미술관 |
고려청자를 사랑한 '푸른 눈의 변호사'
우리 민족 문화재를 지키는 일이 곧 독립운동이라 생각한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를 아우른다. 종류도 서화·도자기·고서·석탑 등 5천여 점에 이른다. 이 가운데 국보가 12점 보물이 30점에 이른다고 하니 놀랄 만한 일이다.
간송이 '문화보국'을 위해 모은 문화재 한 점 한 점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그중에서도 이른바 '개스비 컬렉션'이라 부르는 고려청자 20점을 일본에서 인수해오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극적이다.
▲ 국보 청자 모자원숭이 모양 연적. 고려시대(12세기 중반). 높이 9.8㎝, 몸통 지름 6.0㎝. 연적은 벼루에 먹을 갈 때 쓰는 물을 담는 그릇이다. 간송 전형필이 일본에서 영국인 변호사 개스비로부터 인수한 것이다. |
ⓒ 문화재청 |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골동품상에서 비색의 고려청자를 보게 된다. 신비스러운 푸른 빛깔과 형태가 세계 어느 도자기보다 아름답다며 우리 청자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중국과 일본의 골동품들을 다 팔아버리고 오로지 고려청자만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가 팔아버린 일본 도자기 중에는 훗날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있다.
개스비의 청자 사랑은 대단했다. 일본에서 구입한 청자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터라 어느 해 연말 청자의 나라 한국으로 급히 날아온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장이던 요코다 고로가 가지고 있던 '상감연지원앙문정병'과 '박산향로'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 국보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고려시대(12세기). 높이 37.0㎝, 밑지름 8.9㎝. 개스비가 한국까지 와서 당시 총독부 고등법원장이던 요코다 고로에게서 구입해 간 것이다. 개스비 컬랙션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이다. |
ⓒ 문화재청 |
동경 유학파 출신이었던 간송은 당시 일본의 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던 터라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개스비가 전쟁을 피해 일본을 떠나게 될 것이고 가지고 있던 청자도 처분할 거라 예측했다.
간송은 개스비가 거래하던 골동품 중개상들에게 정보비를 쥐어주고 개스비가 청자를 팔려는 기미가 보이면 제일 먼저 알려달라 부탁한다. 간송의 예상은 적중했다. 1936년 2월 일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2·26 사건이 일어났고 중·일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불안감을 느낀 개스비는 청자를 모두 팔고 일본을 떠날 결심을 한다.
▲ 국보 청자 오리모양 연적. 고려시대(12세기). 높이 8㎝, 너비 12.5㎝. 개스비 컬랙션 중에서 국보로 지정됐다. 물 위에 뜬 오리가 연꽃 줄기를 물고 있으며 연잎과 봉오리는 오리의 등에 자연스럽게 붙어있다. |
ⓒ 문화재청 |
대가는 대가를 알아보는 법이다. 개스비의 안목에 감복한 간송은 개스비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다른 나라 도자기는 수집하지 않았나요?" 그러자 개스비는 "고려자기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다른 자기들은 연대도 많이 떨어지지요. 고려청자를 한국의 수장가인 귀하가 고국으로 도로 가져가게 된 것이 정말 기쁩니다"라고 했다. 과연 대가들 다운 아름다운 거래였다. 그때 간송의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 국보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 고려시대(12세기). 높이는 20㎝. 개스비 컬랙션 중에서 국보로 지정됐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상상 속의 동물인 기린이 꿇어 앉아있는 모습을 한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
ⓒ 문화재청 |
간송이 기와집 400채 값으로 일본에서 되찾아온 20점의 고려청자는 해방 후 4점이 국보로, 7점이 보물로 지정됐다. 아기 원숭이가 엄마에게 칭얼거리며 뺨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표현한 '모자 원숭이형 연적' 상상 속 동물의 자태를 기품 있게 나타낸 '기린형 향로' 물 위에 뜬 오리가 연꽃 줄기를 물고 있는 '오리모양 연적' 청아한 담녹색 계통의 비취색 '원앙무늬 정병'은 국보로 지정돼 고려청자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간송은 '개스비 컬렉션'을 인수해온 이듬해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해 그동안 모은 민족 문화유산들을 보관했다. '빛나는 보배를 모아 놓은 집'이라는 보화각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모더니즘 양식의 2층 건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 간송은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을 설립해 그동안 모은 문화재 보관했다. 지금은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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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132호(2022년 9, 10월)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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