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벗은 尹 '담대한 구상'..비핵화 논의-경제협력 동시가동·부분적 제재 면제 검토
북한이 전향적으로 비핵화 조치에 나설 경우 비핵화 협상과 동시에 남북 경제협력 프로그램을 가동한다는 내용을 담은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이 베일을 벗었다.
윤 대통령은 15일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북한의 비핵화 한반도와 동북아, 그리고 전 세계의 지속 가능한 평화에 필수적인 것"이라며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담대한 구상'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 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프로젝트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과 의료 인프라의 현대화 지원, 국제투자 및 금융 지원 프로그램 등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사에서 처음 밝힌 '담대한 구상'의 윤곽을 내놓으며 북한이 전향적으로 비핵화 조치에 나설 경우 경제협력과, 안전보장 등의 방안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협상 과정부터 대북 지원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 제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김 차장은 "북한 진정성 갖고 비핵화 협상 나올 경우 초기부터 경제 지원 적극적으로 강구한다는 점에서 과감한 제안"이라며 "여기에는 "북한의 광물, 모래, 희토류 등 지하자원과 연계한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 일명 한반도 자원 식량 교환 프로그램(R-FEP·Resources-Food Exchange Program) 등이 포함된다"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는 "그간 북핵 협상 과정에선 늘 북한의 비핵화 초기 조치와 그에 대한 상응 조치 제공의 시기·조건을 두고 기싸움이 이어졌고, 2019년 (제2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것 역시 양국의 대북 제재 해제 조건이 엇갈렸기 때문"이라며 "남북 간 비핵화 논의 착수와 동시에 '담대한 계획'이 가동된다는 건 비핵화 논의와 상응 조치 논의를 투트랙으로 초기부터 조율해 진행함으로써 이런 이견을 최소화해 협상의 걸림돌을 제거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제재도 일부 풀어줄 수 있어
대통령실은 유엔 대북제재를 부분·단계적으로 완화할 수 있다는 입장도 내놨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018년 싱가포르, 2019년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 지도부가 처음부터 가장 관심을 갖고 질문했던 것은 유엔 제재의 부분적인 완화 방안이었다"라며 "필요하다면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에 대한 부분적 면제도 국제사회와 함께 논의해 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앞서 언급한 '한반도 자원식량교환프로그램'(R-FEP)도 이런 맥락에서나온 제안이다. R-FEP는 과거 이라크가 유엔 제재에 직면해 있을 당시 석유를 사주는 대가로 식량을 공급한 '석유식량교환 프로그램'(Oil for food program)과 같이 북한이 비교적 풍부하게 갖추고 있는 광물자원과 식량·생필품 공급을 연계하는 방안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북한 광물자원은 거의 유엔 제재 대상에 포함돼 있다. 4개의 유엔 결의안(2270·2321·2371 ·2397호)이 북한 광물을 외부로 반출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며 "유엔·미국과 북한 인도적 지원을 논의하면서, 식량과 자원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전향적인 조치를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대북제재 해제를 이끌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지적한다.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비핵화 대화는 결국 북ㆍ미를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유엔 제재 완화와 관련해서도 한국이 앞서서 미국을 설득하는 방향으로 가기는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경제·정치·군사 모두 담아
당초 '담대한 구상'에는 북한 비핵화의 상응 조치로 '경제'와 '안보' 두 축이 담길 것으로 예상했으나 윤 대통령의 경축사에는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와 관련한 내용은 없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안보 대 경제 교환' 프레임만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관계자는 "담대한 구상의 비전은 결국 경제‧군사‧정치 3가지 분야에서 남북이 협력을 논의하고, 실천·심화하는 과정에서 비핵화도 동시에 합의·실천되는 것"이라며 "군사 분야에서는 긴장 완화에서 신뢰 구축 단계로, 정치 분야에서는 평화 구축에서 평화 정착 단계로 마무리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영태 교수는 "과거 '비핵·개방 3000'이 원론을 던졌던 것에 비해 '담대한 구상'에선 비핵화 과정에서 북한이 수용 가능한 로드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성이 갖췄다"며 "다만 향후 대화와 지원 등이 이뤄지기 전에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확인하기 구체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도 사전 소통
대통령실은 미국 측과도 '담대한 구상'과 관련한 사전 협의가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플랜을 구체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진전 사항을 논의했다"며 "미국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비핵화 협의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미국 행정부도 현재 엄격하게 이행되고 있는 유엔 안보리 조치에 대해 당사국들과 마음을 열고 논의할 의향이 있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북한 입장에서 '체제 안전'이라는 가장 중요한 조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수용할 유인이 부족하다"며 "북한이 '담대한 구상'에 호응하려면, 남북 경제 협력을 통해 북한 경제가 발전하고 비핵화를 해도 체제 안전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설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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