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익선동 지켜낸 '주택청부업자' 독립운동가 아시나요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종로 한복판에 기묘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짧은 거리 안에 판이한 두 공간 조직이 외따로 떨어져, 섬처럼 떠 있다. 완충지대는 물론 점이지대도 없다. 마치 다가와 있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의 차이처럼, 두 곳은 전혀 다른 도시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 서로 알 필요가 없다는 듯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무척 생경한 공존방식이다.
▲ 익선동 초입 익선 초입에서 본 골목의 모습. 골목 끝 북측으로 호텔이 보임. |
ⓒ 이영천 |
▲ 남측 골목 큰 길로 나가기 전 남측 끝 골목. 젠트리피케이션 영향이 골목을 전부 차지한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장소. |
ⓒ 이영천 |
골목의 변화는 소소한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선의로 시작된 시도가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공간기능의 급격한 천이(遷移)를 불러온, 최근 5~6년 사이 생겨난 변화다. 낡고 오래된 한옥에서 재현된, 실험적인 물리적 재생이 불러온 나비효과였다. 생물과 같이 도시도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가설을 현실이 증명하고 있는 공간처럼 보였다.
이렇듯 넘치는 활기에도 불구하고, 이곳 역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무자비한 공격에 노출되어 이면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이에 여럿이 상처받고 있다는 인상까지 지워낼 수는 없었다.
정세권의 실험
▲ 경성문화주택(1930) 1920년대 후반 경성에 유행처럼 퍼진 서구식 주택. 일제는 한옥을 비위생적이고 저열한 주거공간으로 비하하려는 의도로 이 문화주택을 활용함. |
ⓒ 서울역사박물관 |
3.1운동 이후 설립되어 '주택청부업을 하는 건양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부동산 매입과 설계, 시공 및 분양, 금융알선 일체를 수행했다. 이 회사 대표가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에도 깊이 관여한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정세권'이다. 건양사는 1940년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는 앞 두 조직을 지원한 재정적 영향은 물론, 이로 인한 일제 탄압이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정세권은 일제의 부동산 신탁으로부터 어떻게든 북촌을 지켜내고 싶었다. 한옥의 특성을 지켜내면서, 문화주택처럼 부엌과 화장실 등 위생시설 개선을 추구한다. 아울러 돈 없는 서민들도 집을 쉬이 구할 수 있도록 소규모 한옥 보급을 동시 추구한다.
▲ 익선동 한옥마을(2006) 익선동 한옥마을 항공사진. 주변과 확연히 다른 공간 조직임을 사진은 잘 보여주고 있음. |
ⓒ 서울연구원_한옥멸실연구 |
할부 등 구매자 예산 규모와 수입에 맞게 상환방식을 능동적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금융도 알선하는데, 건양사 신용으로 은행 대출을 도운 것이다. 오늘날 북촌 한옥마을 대부분이 정세권의 손을 거쳤다.
▲ 익선동 한옥현황(2006) 노란색으로 채색된 집이 2006년 현재 한옥. 200여채 한옥은 필지평균면적 63.85㎡에 한옥평균면적 59.75㎡의 현황을 보이는 것으로 서울연구원 연구(한옥멸실연구)는 설명하고 있음. |
ⓒ 서울연구원_한옥멸실연구 |
정세권의 생각을 실현할 부지가 매물로 나온다.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 일원(약 2750평), 철종이 형에게 지어준 '누동궁(樓洞宮)' 자리다. 1930년 이 땅을 정세권이 사들인다. 이곳에 첫 도시형 한옥단지 실험이 이뤄진다. 폭 2.5~3m 골목으로 획지를 분할하고, 인프라를 깔아 도시형 한옥을 시공한 것이다. 익선동 골목은 10~30평형대 다양한 한옥 구성을 보인다. 당시 입주자 구성에도 다양성을 추구한 세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분화하는 공간 조직
익선동 최초 입주자는 당시 지식인과 중산층이 주를 이뤘으리란 추정이 가능하다. 원리금 상환능력이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후 익선동 골목은 주거 기능은 물론 국악 관련 단체와 국악기 판매점, 한복집과 점집이 점유한 공간으로 변했다.
▲ 익선동 중앙 골목 남향으로 집을 앉히기 위해 남북으로 길게 분할한 획지가 뚜렷함. 오래된 한옥의 평면과 구조가 변경된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음. |
ⓒ 이영천 |
돈의동 '명월관'과 인사동 '태화관'이 이러한 도시 활동 시초이자 많은 영향을 끼친 주역이다. 두 곳은 당시 일패(一牌) 기생의 일터였다. 이들이 일제 강점기 후반 익선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다. 명창 '박녹주'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예의범절에 밝고 대개 가정을 꾸렸으며, 노리개로 몸을 내맡기는 짓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 익선-낙원동 풍경(1982) 남산 방향으로 바라 본 풍경. 사진 좌하단 가지런한 한옥마을이 익선동임. |
ⓒ 서울역사박물관 |
한국전쟁 후 밤 문화를 지배하는 요정이 익선동 주변에 번성한다. '오진암'이 대표적이다. 약 700평 규모 단층 한옥이던 이 집이 1972년 남북교류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제2 부수상이 이곳에서 만나 '7·4 남북 공동 성명을 논의'한 것이다.
이런 입지 여건으로 요정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한복 공급처가 바로 익선동 골목이었다. 이들을 단골 삼아 한복집과 점집이 이곳을 차지하게 된다. 매매춘에 노출되어있는 각박한 삶을, 그녀들이 무속신앙에 의지한 까닭이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노출된 공간
▲ 중간 골목 오래된 한옥이 평면구성 변화를 통해 다양한 업종의 점포가 되었음. 낙원동 쪽으로 보이는 오피스텔 부근이 익선동으로 들어서는 초입. |
ⓒ 이영천 |
이런 순박한 공간에 폭탄 하나가 떨어진다. 2004년 철거재개발이 주 내용인 '익선 도시환경 정비구역'으로 지정 계획이었다. 가까이에 종묘와 창덕궁이 자리한 까닭에 문화재청과 재개발위원회 간 대립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2010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지역 특성상 한옥 보존이 바람직'하다며 지정 계획을 부결시킨다. 2015년 '지구단위계획'에 들어가 2018년 한옥 보존지구인 '익선 지구단위계획구역 및 계획 결정'이 이뤄진다. 이로써 철거재개발이 불가능해지고, 돈화문로 등 큰길가는 건물 높이 20m 이하만 가능하고, 프랜차이즈 업체는 입주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지역 보존이 가능한 최소 장치 마련인 셈이다.
익선동 젠트리피케이션 시작은 우연에서 시작되어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좋은 뜻으로 입주한 한 카페가 계기였다. 이 카페에서 영화가 촬영되고, 오래된 익선동 골목이 다큐멘터리로 공중파를 타게 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기존 악기점과 한복집, 점집이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다. 더불어 원주민과 세입자가 내쫓김을 당한다. 2014년 이후 벌어진 일이다.
▲ 북측 골목 종로 세무서 쪽에서 들어서면 보이는 골목의 모습. |
ⓒ 이영천 |
현재 익선동 지대(地代)는 임계점에 다다랐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업종구성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임대료와 구매 능력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공간 조직은 붕괴한다. 한때 핫플로 화제를 모았던 '경리단길'이 대표적이다. 임대인과 임차인 간 상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기간 살아남는 골목을 만들려는 약속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