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죽고 나 죽자'.. 도토리 놓고 벌어지는 복수전 [ 단칼에 끝내는 곤충기]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재미난 곤충기를 얕은 지식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보통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흥미로운 이야기이므로 얘깃거리로 좋습니다. <기자말>
[이상헌 기자]
참나무과(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에 속하는 여러 나무의 열매를 도토리라고 한다. 암사동 선사유적지의 유물을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은 석기시대부터 도토리를 먹어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산림경제>와 <목민심서>에는 구황작물의 하나로 도토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흉년이 든 해에는 목숨을 연명하는 비상식량이었다.
오늘날에는 풍부한 알칼리 성분에 포만감을 더해주므로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가 있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 뒤에는 매콤한 냉면에 도토리묵을 넣어 무치면 뒷맛이 깔끔해진다.
▲ 도토리거위벌레가 알을 낳고 가지째 잘라낸 도토리. 일부 도토리를 솎아내어 더 실하고 큰 열매가 영글게 한다. |
ⓒ 이상헌 |
도토리에 알을 낳고 가지째 잘라낸다
장마가 지난 한여름 숲을 걷다 보면 덜 여문 풋도토리가 가지째 잘려져 있는 광경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거센 비바람에 떨어진 낙과이려니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도토리거위벌레의 작품이다. 인간보다 먼저 도토리의 맛을 알아버린 도토리거위벌레의 산란법을 알아보자.
어미가 알을 낳는 과정은 서너 시간이 걸리는 고된 노동이다. 먼저 도토리가 열린 나뭇가지를 반 정도 잘라서 기초 공사를 해놓고 송곳 같은 주둥이로 도토리 속을 파낸다. 자기 몸통만큼이나 길쭉한 부리 끝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기에 드릴과 톱의 역할을 겸한다.
▲ 도토리거위벌레. 송곳 같은 주둥이로 도토리에 구멍을 내고 산란한다. |
ⓒ 이상헌 |
도토리 흉년이 들면 암컷끼리의 경쟁이 치열하여 동족 파괴 행위를 저지른다. 다른 암놈이 파고 있는 도토리를 빼앗은 뒤 산란한 알을 제거하고 자신의 알을 깐다. 당한 암컷은 복수심에 불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뭇가지를 끊어내어 버린다.
주둥이가 아닌 목이 길게 뻗어 나온 왕거위벌레는 참나무와 오리나무류, 자작나무 잎을 먹고 산다. 몸길이는 10mm 전후이며 다른 종과의 경쟁을 피해 도토리가 열리기 전까지 활동한다. 열매가 아닌 나뭇잎을 김밥처럼 말아서 아기 요람을 만들며 약 2시간에 걸쳐 산란하므로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다.
신중하게 고른 잎의 중간을 반으로 자르고 주맥은 남겨둔다. 절반으로 나뉜 잎끝을 두세 차례 말은 뒤 알을 낳고 다시 잎을 말아서 마무리한다. 남겨진 주맥 위쪽의 잎은 지붕 역할을 하며 영어권에서는 잎을 마는 특성에 주목하여 잎말이바구미(leaf-rolling weevil)라고 부른다.
주삿바늘 주둥이로 도토리에 구멍을 낸다
▲ 도토리밤바구미. 삶은 밤에서 나오는 애벌레의 정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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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지자체에서 도토리는 다람쥐와 멧돼지 같은 동물의 식량이 되므로 채취하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매단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멧돼지가 인가로 내려와 농작물을 훼손하는 악순환이 벌어지므로 나 하나쯤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더욱이 다람쥐는 자신의 영역을 돌아다니며 땅속에 도토리를 묻는다. 겨울을 대비하여 비상식량으로 삼기 위함이다.
다람쥐의 이기적인 활동은 생태계의 건전한 순환을 돕는다. 참나무 열매를 멀리 떨어진 장소로 퍼뜨려 숲이 울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다람쥐는 도토리를 숨겨 놓은 장소를 항상 까먹는다. 결국 건망증이 참나무 숲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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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해당 기사의 사진은 글쓴이의 초접사 사진집 <로봇 아닙니다 곤충입니다>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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