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붉은 꽃 없다고요? 이 꽃은 백일 동안 붉습니다
[임영열 기자]
▲ 포충사 신사당 내삼문의 배롱나무 |
ⓒ 임영열 |
흔히들 하는 말로 '화무십일홍(花無 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한다. 아무리 붉고 아름다운 꽃이라도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요즘 시중에서는 5년마다 진보와 보수 정권이 뒤바뀐다는 의미로 '권불오년'이라는 말이 더 회자되는 것 같다.
시인 양만리가 찬양한 월계화(月季花)는 중국 남쪽 지방에서 자생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야생 장미의 일종으로 개화기간이 길어 4월부터 9월까지 수시로 꽃을 피운다. 뿌리와 잎은 약용으로 사용한다.
▲ 포충사의 배롱나무 |
ⓒ 임영열 |
송나라 시인 양만리가 월계화를 사랑했던 것처럼, 조선 전기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쿠데타를 죽음으로 항거했던 여섯 명의 충신,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중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 유독 사랑했던 붉은 꽃이 있다.
"어젯밤 한 송이 떨어지고(昨夜一花衰)/ 오늘 아침에 또 한 송이 피어(今朝一花開)/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相看一百日)/ 너와 마주하여 한 잔 하리라(對爾好衡杯)"
▲ 포충사 신사당 내삼문 앞의 배롱나무 |
ⓒ 임영열 |
본격적인 불볕더위가 시작되는 요즘, 남도 지방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꽃이 있다. 한 낯 폭염에도 화사하게 붉은빛을 뭉텅이로 토해내는 배롱나무 꽃이다. 배롱꽃은 나라꽃 무궁화와 연분홍 실타래를 늘여 놓은 듯 한 자귀나무 꽃과 함께 남도의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다.
▲ 포충사 배롱나무 |
ⓒ 임영열 |
100일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목 백일홍은 배롱꽃, 자미목, 해당수, 양양수, 백양수, 간지럼나무, 파양수, 만당홍, 쌀밥 나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무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는 방증이다.
그중에서 '쌀밥 나무'라는 이름은 어떻게 얻게 됐을까. 남도지방에서는 이 꽃이 세 번 피었다 지면 비로소 벼가 익어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밥 나무라고 불렀다 한다. 배고프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다.
▲ 포충사 신사당. 1980년대 유적 정화사업으로 지었다 |
ⓒ 임영열 |
요즘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압촌마을 제봉산 기슭에 있는 포충사는 전국 각지에서 오는 사진 동호회 회원들로 붐빈다. 경내에 만개한 붉은 배롱꽃을 담기 위해서다. 국가명승으로 지정된 담양 명옥헌의 배롱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들 입을 모은다.
▲ 포충사 옛 사당 외삼문의 배롱나무 |
ⓒ 임영열 |
호남의 대표적 호국선열 유적지로 조성된 포충사(褒忠祠)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7월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과 그의 두 아들을 비롯한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호남의 유생들은 고경명 선생과 두 아들을 비롯한 충의의 인물들을 모실 사당을 건립하였고 1603년 선조는 '포충(褒忠)'이라는 액호를 내렸다. 1980년대 유적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사당과 유물관을 건립하였다. 경내는 옛 사당 구역과 새로 지은 사당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 포충사 옛 사당 내삼문 앞의 배롱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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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 비운의 천재, 최치원을 배향하는 '지산재'
포충사에서 멀지 않은 곳, 남구 양과동 지산 마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산 아래에 잘 꾸며진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깨를 나란히 나란히 하고 있다. 검은 기와지붕과 붉디붉은 배롱꽃의 조화가 아름답다.
▲ 지산재. 검은 기와지붕과 붉디붉은 배롱꽃의 조화가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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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산재는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학문의 공간인 지산재 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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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년 영조 13년에 이곳에 영당을 건립하여 고운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다가 1846년 지산사를 건립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22년 다시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당과 내삼문, 강당인 지산재, 동재와 서재, 솟을대문이 있다. 전면에 학업의 공간을 배치했고 후면에 묘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 지산영당의 배롱꽃. 단청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
ⓒ 임영열 |
▲ 지산영당의 배롱꽃이 신라 말 비운의 천재, 최치원 선생을 위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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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간의 당나라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 신라로 돌아왔지만 골품제에 의한 신분 차별은 여전했다. 38살이 되던 해 시국 타개책으로 진성여왕에게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건의했지만 성골과 진골 세력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신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한 최치원은 침몰해가는 신라를 뒤로하고 전국을 떠돌다 말년에 해인사로 들어가 여생을 마친 비운의 천재였다.
왜 이리 늦었던가... 늦게 돌아온 사람 효우당의 '만귀정'
이제 광주 서구 쪽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서구에도 배롱꽃이 아름다운 문화유산들이 여러 곳 있다.
▲ 늦게 돌아온 사람 효우당의 만귀정이 붉은 배롱꽃으로 뒤덮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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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귀정은 광주 서구 8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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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농토를 가진 동하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인공으로 조성된 커다란 연못에 세 개의 정자가 일렬로 나란히 서있다. 연못에는 연잎들이 푸르고 정자들은 각종 수목과 붉은 배롱꽃으로 뒤덮여 있다.
▲ 만귀정은 세 개의 정자가 일렬로 나란히 서있다. 각각의 정자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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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귀정은 1750년경 조선 영조 때 남원에 살던 흥성 장씨의 선조인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羽 1704~1774)가 이곳으로 이거한 후 후학들을 가르치고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보내고자 지은 정자다.
처음엔 초가로 지어진 것을 1934년에 후손들이 정면 측면 두 칸에 팔작지붕으로 다시 지었다. 지금도 이곳 동하마을은 흥성장씨의 집성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야은당. 거사 김용훈이 은거했던 곳에 제자들이 지은 정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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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창 한옥마을에 자리한 야은당이 붉은 배롱꽃에 덮여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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