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진보적 조강지처' 호적 말소로 봉인한 이유
"사회적 풍습을 벗어나는 것 쾌념치 않는" 불륜녀로 낙인..시대에 희생된 '조강지처'
1945년 10월 16일 망명가 이승만(1875~1965)이 33년 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10월 24일 지지자의 도움으로 서울 돈암장을 거처로 삼았다. 금의환향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강지처를 찾지 않았다.
그때 이승만의 아내 박승선(1875~1950 추정)은 황해도 연백과 평안남도 진남포를 떠돌며 살고 있었다. 앞서 얘기(‘이승만 대통령 본처, 버림 받고 법사에 사기·폭력 당한 기구한 삶’)했듯, 박승선은 1920년대 서울 창신동 지장암 법사 등에 의한 사찰 중건 사기 사건에 휘말려 창신동 땅을 잃었다.
또 그 땅을 기독교 박애 정신에 따른 구제 사업 일환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면서 결과적으로 이승만 소유 서울 창신동 땅 2만㎡(6000여 평)를 잃고 창신동 625번지에서 627번지로 옮겨 초라한 집에 살다 그마저도 유지를 못했다.
아무튼 박승선은 이제나저제나 금의환향한 남편이 연락을 주리라 믿었다. 우남(이승만의 호) 귀국 소식에 벌써 황해도지사 같은 이들이 박승선에게 축하한다며 인사를 왔다. 하지만 귀국한 남편으로부터 끝내 소식이 없었다. 1910년 첫 망명 5년 만에 귀국했을 때도 박승선을 피했던 이승만이었다.
그렇게 돈암장까지 갔음에도 면담이 이뤄지지 않았다. 비서실장 격인 임영신(1899~1977·여성 정치가 및 교육가)이 막아섰다. 게다가 프란체스카(1900~1992) 여사 귀국(1946년 3월 25일)에 따른 환영회가 열린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에 분노한 박승선은 고령에도 불구 8일간 단식했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성령 체험을 한 후 박승선에게도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심어줘 금식 개념의 단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박승선은 “내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이승만의) 첩이지, 부인이 아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항의했으나 허사였다.
그렇다면 양아들 ‘철호’ 씨는 누구일까. 동갑내기 이승만 박승선은 1891년 부모가 맺어준 대로 혼인했다. 그리고 1899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수감 됐을 때 아들 봉수(이명 태산)를 얻었다. 6대 독자 이승만에게 너무나 귀한 핏줄이었다. 이승만은 그 아들을 1906년 4월 미국으로 들어오게 했다. 하지만 10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숨졌다. 봉수를 미국으로 데려온 이가 독립운동가 박용만(1881~1928)으로 알려졌다.
그런 부부에게 양아들이 있다? 합의된 양아들이라면 문제가 될 리 없다. 그런데 이승만은 양아들 ‘철호’ 씨 부정했다. 아내에 의한 ‘막장 드라마’로 여겼다. 왜냐면 이승만이 1912년 2차 망명을 했는데 1916년 아내가 아이를 입양해 호적에까지 올렸으니 ‘구식 아내’가 싫었던 그로선 불륜으로 의심을 할 수밖에. 훗날 이승만 측이 ‘훼절한 여인’으로 몰아붙이고 눈길도 안 준 이유가 됐다.
또 철저한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 입장에서는 아내가 ‘법사를 통해 지장암에 시주’한 것도 통분할 일인데 웬 아이를 얻어 자신의 호적 밑으로 두었으니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역만리 미국에서 지인들을 통해 이러한 소식을 듣다 보니 ‘종교란 어차피 선한 일을 하는 일이니 어려운 이웃을 돕는 심정으로’ 법사에게 땅을 빌려준 박승선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박승선과 양자 철호 씨 그리고 이승만, 박승선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하자면 박승선은 “(철호를) 개구멍받이로 얻었다(문 앞에 버려진 아이를 얻었다는 뜻)”는 것이다.
이런 부부간의 문제가 ‘사랑과 배신’을 넘어 ‘사랑과 권력’의 문제로 비화 된 것은 이승만이 박승선의 호적을 파버리면서다. 초대 대통령의 ‘총각 결혼 프로젝트’ 일환임이 훗날 밝혀졌다.
다음은 이승만의 배재학당 동창이자 1910년대 미국 유학한 신흥우(1883~1959·배재학당장·친일파)의 증언이다. 1949년 4월 12일 신흥우는 이승만의 고문 로버트 올리버와의 ‘이승만을 말한다’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승선은) 성격이 급했고 진보적이었다. 사회적 풍습을 벗어나는 것을 괘념치 않았다...황제에게 남편을 석방해 달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이승만 부인은 퍽 오랫동안 혼자서 언덕 위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하숙을 치기도 했고...하숙 들었던 어떤 한국인과 실질적인 부부관계를 맺게 되었다”
여기서 ‘황제’ 부분은 고종 임금을 말한다. 군주제에 반대한 엘리트 청년 이승만이 공화정을 외치는 것만으로 역모 혐의인 세상이었다. 당연히 체포됐고 한성감옥에 갇혔다. 그러자 부인 박승선이 1899년 대한문 앞에서 남편 석방 촉구 금식 투쟁을 벌인다. 신흥우의 말대로 ‘진보적 부인’인 셈이다. 당시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의 보도 내용.
‘장동에 사는 박 부인이 감옥에 갇힌 전 의관(중추원) 이승만씨의 일로 상소를 받들고 그저께부터 인화문(대한문) 밖에 업드려 석방을 호소하더라’(독립신문 1899년 3월 25일 자)
‘감옥서에 갇힌 중추원 전 의관 이승만 씨의 부인이 차라리 나를 가두고 자기 남편을 석방해 달라고 인화문 밖에서 상소하느라고 이틀을 업드려 있었다. 이에 궁내서 순검이 칙임관 외에는 상소를 못 하므로...상소할 일이 있으면 중추원에 탄원하면 중추원에서 의정부로 이관하므로 부인께서 여기 백날 있어봤자 절차가 틀려 받지 아니하므로...’(제국신문 1899년 3월 27일자)
어쨌든 박승선은 분명한 조강지처였다. 대한문 앞과 돈암장 방문 때 ‘철야’와 ‘금식’ 시위를 할 만큼 진보적이었던 것도 맞다. 이 ‘진보적(거칠다)’이란 에두른 표현도 부부의 속사정과 시대 상황을 알면 180도 다른 해석이 나온다. ‘신앙인 박승선’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무학자에서 기독교 불세례를 받은 박승선은 성경 말씀대로 살았다. 고난이 닥치면 기도와 금식으로 풍파를 헤쳐나갔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괄괄하고, 거칠고, 진보적으로 비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창신동에 무학자들을 위한 보종학원을 세우고,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부부)의 땅을 상대의 형편에 따라 무상, 혹은 적은 세를 받고 집을 짓게 했는데 이 역시 보는 시각에 따라 큰 흠이 됐다. 특히 프란체스카가 ‘첫 결혼 상대자’이고 그녀를 영부인으로 만들려는 이승만 입장에서는 말이다.
어쨌든 그런 박승선은 신흥우 증언 그대로라면 졸지에 불륜녀가 된다. 독립운동가의 부인이 ‘언덕 위의 집’(창신동 지장암 인근)에 살면서 샛서방을 들여 바람을 피웠다는 얘기가 된다. 아이는 그래서 생긴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니 이승만은 돈암장 등에 세 차례나 찾아온 박승선을 내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던 차에 신흥우 증언이 나왔다. 뭔가 정치적 의도가 담겼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해방 정국에서 김구 등과의 권력 투쟁 와중에 이승만은 남모르는 삼각관계의 ‘사랑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걸 일지 형식으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1891년 이승만, 아버지 주선으로 박승선과 구식 결혼
1899년 아들 이봉수 출생(1906년 사망)
1904년 11월 4일 이승만 1차 망명
1910년 10월 10일 환국
1912년 3월 26일 2차 망명
1912년 12월 4일 이승만 부친 이경선 사망
1916년 박승선 양자 철호(가명) 입양
1916년 3월 18일 서울 창신동 이승만 명의 집에 부부 밑으로 양자 철호 등 가족 7명 입적(이승만 직업 청년회 학생부 총무)
1933년 2월 21일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첫 만남
1935년 1월 24일 이승만 프란체스카와 하와이 도착
1945년 3월 9일 이승만 프란체스카 사실혼 부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부인 일리노어 여사 면담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 환국
1945년 12월 이승만, 돈암장 찾아온 본처 박승선 면담 거부
1946년 3월 25일 프란체스카 한국 입국, 돈암장 행
1947년 10월 19일 이승만 프란체스카, 서울 종로구 ‘이화장’ 입주
1948년 7월 24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1949년 4월 12일 신흥우, 이승만 본처 박승선 ‘불륜녀’ 폭로
1949년 5월 16일 이승만, 이기붕 명의로 친족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이철호와 그의 자녀 삭제 요구)
1949년 7월 28일 이승만 창신동 가족관계 호적 말소 및 서울 종로 이화동 1번지 전적
1950년 4월 프란체스카와 종로구청에 결혼 신고
이 초대 대통령의 삼각관계는 1965년 조선일보 등 각 신문의 추적 보도 이후에야 밝혀진 사실이다. 당연히 법률적 논리에도 맞지 않게 전격적으로 단행된 호적 말소였다.
사실 박승선은 여성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전형적인 조선의 하층 계급이다. 그의 어머니가 궁녀였다는 얘기가 있다. 조선 시대 하층 여성이 그랬듯 ‘박승선’의 이름 석 자는 없었다. 개화한 이승만이 자신의 이름 가운데 자를 따 ‘승선’으로 작명해 이름을 얻게 됐다.
이승만이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사랑했고, 남편의 사랑으로 민족교회의 산실 서울 상동교회에 다니며 ‘신여성’(전동교회 전도사가 됐고 학교도 운영. 전동은 현 서울 견지동)이 된 박승선. 그는 기독교 민족주의자이며 공화주의자인 남편이 한성감옥에 갇혔을 때 금식으로 석방을 호소한 여걸이었는데 왜 버림을 받았던 걸까.
이 여인은 조선말의 인습과 식민지 여성 현실, 해방 후 혼란과 6·25전쟁의 비참함이 남편 이승만의 권력욕과 맞물리며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어떻게든 ‘지워져야 하는 마녀'로 봉인됨을 요구당한다.
그렇다면 망국을 코앞에 둔 조선의 필부필부(匹夫匹婦)는 어떻게 만나 사랑을 하고 배신을 한 것일까. <하편에 이어짐>
laka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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