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말고 개 키우세요" 정신과 의사의 협박 아닌 협박
정신과 의사의 권유로 반강제로 개를 키우게 된 우울증 환자가 개로 인해 웃고 울며 개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편집자말>
[이선민 기자]
"고양이로 하겠습니다."
"안 돼요."
"왜요?"
"제가 개를 키우라고 한 건, 개 때문에라도 환자분이 집 밖에 나가라고 한 건데 고양이를 키운다는 건 더더욱 집에 있겠다는 거잖아요?"
"개는 돈 많이 들어요. 돈 없습니다."
"유기견 키우세요."
인정머리 없는 정신과 선생님의 태도에 나는 짤막한 한숨을 쉬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고개를 떨구니 선생님의 펜 끝엔 벽돌만큼 두꺼운 내 차트가 보인다.
놀랄 일 아니다. 병원에 다닌 지 벌써 17년이나 됐으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오랜 불면증과 편두통에 시달려 어깨를 구부리고 좀비처럼 걸었다. 이제는 아니다. 상태가 많이 좋아져 허리에 제법 힘을 주고 다닐 수 있다.
병의 차도에 따라 약의 함량은 조절하는데 아주 끊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 나의 불안과 우울은 당뇨나 고혈압처럼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지병일지 모른다.
사람 대신 개를 선택했다
내 병은 삼풍백화점 사고를 겪은 후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다. 약을 먹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힘들어 꾸준히 병원에 다닌다. 덕분에 서른 넘어서는 엄마보다 선생님을 더 자주 봤다. 한 달에 두 번 이상 정기적으로 봤으니.
한데 그런 선생님이 얼마 전부터 내게 사람을 만나거나 개를 키우지 않을 거면 다음 진료에 오지 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 다 못하겠다.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 돌 던지는 사람이나 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개나 둘 다 질색이다. 마치 좌회전도 우회전도 안 되는 막다른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선생님을 잃는 건 더 끔찍하다. 그러니 어째.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병원에서 돌아온 후로 몇 날 며칠 잠까지 설치며 고민하다 끝내 개를 선택했다. 당연하지.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일단 포인 핸드라는 휴대폰 앱에 접속해 유기견들을 살펴봤다.
생각보다 많은 생명이 매일 새로 이름을 올렸다. 한데 사진만 보고 개를 고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라면이나 계란이라면 모를까 십 년 넘게 같이 사는 개를 고르는데 사진 몇 장과 글 몇 줄이 전부라니, 이건 아닌 거 같다.
당장 실물을 보고 싶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개를 직접 보는 일이 어려웠다. 맘먹은 건 뭐든 후딱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나는 에라, 모르겠다. 눈 한 번 질끈 감고 가까운 마트 일층에 전시돼 있는 애들 중 하나 찍어 데려오자 했다.
▲ 포인핸드에 공고 올라온 복주 사진 |
ⓒ 이선민 |
구조 사연을 보자 하니 이 친구는 서울 변두리 산 밑에 누가 버리고 간 개 중 하나였다. 영하 20도가 넘는 한겨울에 얼어 죽으라고 형제들과 물도 밥도 없는 구덩이에 버려졌으나 때마침 개 산책을 나온 분을 만나 기적적으로 구조된 아이였다(참고로 일곱 형제들이 전부 '복'자 돌림이다. 복만이, 복희, 복주 등등).
개한테 확신이 생긴 나는 임보자(강아지를 임시로 보호해주는 개인을 일컫는 말) 분께 입양 신청서를 넣고 면접을 본 후 위 사진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복주라는 친구를 데려오기로 했다.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 통지를 받은 나는 일단 인터넷 서점에서 '반려견' 키워드로 검색된 애견 관련 서적 십여 종을 바로 주문했다. 강아지 응급 119부터 애견 간식 수제 레시피까지 종류별로 샀다.
▲ 복칠남매 중 제일 왼쪽이 복주 |
ⓒ 이선민 |
개가 온 후 한 달 간 나는 책에서 본 대로 별다른 용건 없으면 개를 만지지도 않고 다정하게 부르지도 않았다. 개도 그런 내게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반려가 아닌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이때 일을 몹시 후회한다. 어느 날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 가뜩이나 불안한 강아지를 따뜻하게 대해 줘도 모자랄 판에 교육한답시고 한 달이나 차갑게 대했던 일들 말이다. 부모형제와 떨어지고 정든 임보 가족과 떨어져 심란할 복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책에서 시키는 대로 훈련에만 집중한 일.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분리불안 교육한답시고 한 시간 정도 개만 두고 혼자 외출했다. 미리 설치해둔 CCTV로 집안을 살피니 복주는 베란다에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안심하고 볼일을 마저 보고 집에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5개월의 어린 개가 모기장을 뜯고 베란다 창을 통해 바깥으로 뛰어내린 게 아닌가.
다행히 그때 우리 집이 언덕에 위치한 천장 낮은 다가구 주택 이층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한심하다. 입장 바꿔 놓고 나한테 개 같은 조건, 아니 사방 천지가 들판인 곳에 혼자 네 시간(개의 시간은 인간보다 4배 빨리 간다) 있으라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아마 나는 십중팔구 구조되기 전에 공황발작을 일으켰을 거다.
이 사건 이후 나는 크게 각성하여 개를 더 잘 보기 위해 노력했다. 이 일로 깨달은 건 사람도 그렇지만 개 육아도 절대 하나의 진리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책이든 미디어든 다른 이들의 조언과 충고를 덮어 놓고 따르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 개의 훈련 방식은 그 개를 잘 아는 내가 정하는 게 맞다. 개들도 사람 얼굴처럼 성격이나 환경이 저마다 다르기에 원론적인 이야기 빼고 외부의 정보만 맹신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 복주 처음 만난 날 |
ⓒ 이선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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