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 끓으면 어김없이 들리는 말 "누구 생일이에요?"

한미숙 입력 2022. 8. 1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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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 같은 맛, 미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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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숙 기자]

  미역국
ⓒ 한미숙
미역은 우리 집에서 자주 해 먹는 음식이 아니다. 식구 중에 생일이 다가오면 그제야 미역국 생각을 한다. 엄마의 백일제를 셈하다 불쑥 베란다 한 귀퉁이에서 나는 미역을 찾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한여름에 미역오이냉채를 해 먹으면서도 미역국 끓일 생각은 잘 못한다. 딱딱한 미역에 물을 붓고 손으로 누르자 손끝에 미끈한 감촉이 스쳤다. 미역을 보니 '이모~ 오늘 누구 생일이에요?' 하는 정아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나를 이모라 부른 아이들

아이들이 둘, 셋 자는 방에 들어가면 언제나 젖비린내가 났다. 아침 6시, 알람을 해놓은 시계에서 전화벨소리가 연거푸 시끄럽다. 잠이 덜 깬 정아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묻는다. '이모~, 오늘 아침엔 뭐 먹어요.' '미역국.' '옥이 언니 일어나, 미역국이래~' 정아가 누워 뒤척이는 중학생 옥이를 흔들었다. 정아는 홈에서 가장 어린 초등학교 2학년이다.

아이들이 자는 방문을 열면 밤새 갇힌 텁텁한 공기가 일시에 얼굴로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나를 이모라고 불렀다. 엄마가 아니니까. 다만 엄마역할을 한다. 공동생활가정 여자그룹홈(홈)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집과 학교의 생활을 살펴보며 때론 몸이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간다.

해가 바뀌어 상급 학년으로 진학하면 담임을 새로 만난다. 새 담임에게 아이의 형편과 상황을 전달하면서 정상참작을 위한 상담도 매년 반복된다. 이 또한 부모가 할 일의 대역을 하는 셈이다. 또 아이 학습 보충을 위해 학원을 알아보고 특성을 살려 체육이나 미술 지도를 받게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등교하면 그때부터 컴퓨터 앞에 매달린다. 아이들 개인마다 학교생활과 가정생활, 친구 관계에 특별한 문제 사항이 있었는지, 있다면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지도했는지를 기록해야 한다. 홈의 아이들은 7명이 꽉 채워진 상태다.

아침 8시 30분, 미처 끝내지 못한 서류를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원장과 사회복지사가 출근한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회의 겸 인계를 하고 퇴근하면 이틀을 쉰다. 그 이틀은 밤새 잠을 설친 보상의 시간으로 다음 근무를 위한 충전의 휴식이 될 수 없었다. 집에 가면 침대에 널브러진 채로 하루가 꼬박 지났다.

엄마 미역국은 누가 끓여줬을까

식탁에 둘러앉아 미역국을 먹는 아이들의 고만고만한 머리통 위로는 똑같은 샴푸 냄새가 났다. 홈에서 아침에 미역국을 끓이면 그날은 으레 누군가의 생일이다. 아이들이 기대하는 날이기도 하다. 저녁엔 케이크에 초를 꽂고 축하 메시지를 전하며 치킨과 피자를 맘껏 먹는 파티를 한다.

넉넉하게 준비해도 아이들은 허기진 듯, 치킨과 피자에 올인한다. 언젠가 정아가 자기는 1인 1닭을 한다고 욕심을 부리다 탈이 났다. 소화제를 먹이고 등을 쓰다듬으니 끅, 끅 트림했다. '좀 시원해?' '네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아야, 여기 반듯이 누워봐. 이모 손이 약손 해줄게." 정아가 냉큼 누웠다. "이모 손이 약~손, 정아 뱃속은 시~원! 이모 손이 약~손, 우리 정아 뱃속은 시이~원..."

정아가 누워서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정아와 눈을 맞추며 아이의 똥똥한 배를 부드럽고 둥글게 만져주었다. 몇 번을 반복하다 어느 틈에 내 입에선 나직한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오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자미 드음니다..."

눈을 감은 정아가 잠든 줄 알았는데 아이 눈가엔 얼핏 물기가 어렸다. 나는 모른 체 하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가정폭력이나 부모이혼, 보호자 부재 등 저마다의 사정으로 그룹홈과 연계된다. 정아보다 훨씬 더 어린아이가 입소할 때도 있다. 나이 쉰 중반에 나는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으로 그룹홈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이들 밥을 해줘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면접 때 첫 질문이었다. 나중에 원장한테 듣게 된 얘기로는, 나보다 훨씬 젊은 40대 여성이 면접을 봤는데 그이는 밥은 해줄 수 없다고 해서 무척 아쉬웠단다. 그 대안이 나였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밥을 해 먹이는 일은 당연했다. 나는 아이들과 생활하며 즐겁게 일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3년이 지나자 근무시스템이 바뀌면서 한 달 4번의 당직이 열흘 이상이 되었다. 집에 오면 몽롱한 상태가 되고 출근 시간엔 어디론가 나를 찾지 않은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에 거의 1년을 시달리다 입사 4년에 퇴사했다. 올 여름, 꼭 5년 전의 일이다.

물을 만난 딱딱한 미역이 보드랍게 풀어졌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첫국밥은 바로 애기 젖이 된다면서 부드러운 미역이 참기름에 뽀얗게 우러난 미역국과 쌀밥을 매일같이 해오시던 엄마. 참기름에 달달 볶아 집간장으로 맛을 낸 미역국 한 수저를 입에 넣었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처럼 나직하고 은은한 맛이 입 속에 머문다. 나를 낳고 엄마는 누가 미역국을 끓여줬을까. 문득 목이 멘다.

'이모~ 오늘 누구 생일이에요?' 지금은 중학생이 되었을 정아 목소리가 다시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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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황토의 브런치'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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