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30>] 이상한 소문

데스크 2022. 8. 1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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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30화 이상한 소문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대학 캠퍼스 곳곳은 온통 봄의 전령이 차지하고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척박한 땅 위로 은실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바짝 메마른 나뭇가지에 서서히 움이 트기 시작했다. 누렇게 말라버린 잔디로 황량하기 이를 데 없던 잔디밭은 파릇파릇한 새순을 힘차게 밀어 올렸다. 바야흐로 봄의 교향곡이 웅장하게 울려 퍼질 무렵이었다. 이철백은 봄 향기 가득한 캠퍼스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로질러 2학년의 첫 강의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교수의 강의내용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당구를 처음 배운 사람이 방에 누워있으면 천정이 당구대로 보이고 바둑에 빠지기 시작한 사람이 판때기만 봐도 바둑판을 연상하게 되듯 연애에 정신이 빼앗긴 이철백의 눈앞엔 오로지 방선희의 웃는 얼굴만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이철백은 잠시 쉬는 시간에 가방을 챙겨서 다음 강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선희를 찾아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방선희의 학과사무실에서 어렵게 수강신청서를 입수해 온종일 강의실을 찾아다녔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개강 첫날부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이철백은 조바심으로 가슴이 타들어갔다. 지난겨울 자신의 가슴에 무럭무럭 사랑을 키워놓았던 방선희였기에 이철백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철백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스름이 지고 난 저녁부터 방선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이어질 뿐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 후 이철백은 방선희가 휴학계를 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방선희의 학과사무실 조교를 통해서였다. 이철백은 그날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 실례를 무릅쓰고 방선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방선희는 자정이 다 된 시각에 비로소 전화를 받았다. 이철백은 기쁨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찌된 거야, 선희야!”


“저, 동생인데요.”


“그, 그, 그래요? 어, 언니는 없어요?”


이철백은 순간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지금 없는데요.”


“어디 갔어요?”


“네, 아르바이트하러 갔어요.”


“언제 들어와요?”


“아침에요.”


다음날 이철백은 학과 사무실에서 주소를 알아내 오전 수업만 마치고 방선희의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방선희의 집은 변두리 달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산비탈의 정상 부근까지 블록을 쌓아올린 것처럼 성냥갑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봄기운이 물씬한 동네는 이따금 재래식 변소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지만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탈길 가장자리에 군데군데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피어 있어 시골에 온 듯 정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양철 문에 검은 매직으로 또박또박 적어놓은 주소를 눈으로 짚어가며 방선희의 집을 찾아냈을 때 이철백은 산의 중턱쯤에 와 있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방 하나와 부엌만 덩그러니 있었고 낮은 시멘트 담장은 이철백의 가슴께에서 멈춰져 있었다. 툇마루 아래 신발 세 켤레가 있었는데 슬리퍼와 단화, 그리고 굽이 높지 않은 하이힐이었다. 방선희가 집에 있다는 증거인 것만 같았다.


“선희야.”


이웃이 신경 쓰여 목청을 낮춰 불렀더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철백은 몇 번 더 소리 죽여 방선희를 부르다가 목청을 가다듬고 제대로 소리를 질렀다.


“선희야!”


이윽고 나무문살에 창호지를 바른 앙증맞은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방선희는 잠결이었는지 햇살에 눈부셨는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얼굴을 내보였다. 이철백은 반가운 마음에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방선희는 깜짝 놀란 듯 황급히 방문을 닫았다.


“선희야, 잠깐 얼굴 좀 보자.”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이철백이 사정해도 방선희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 앞에 다가가 한 번 더 애원해 보려고 이철백이 목청을 가다듬는데 문득 방선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향(茶香)에 먼저 가있어. 이철백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비탈길을 내려왔다.


방선희가 다향에 나타난 건 이철백이 기다림을 감내하면서 물을 두 컵이나 마시고 난 이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방선희를 보자마자 이철백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방선희는 못 알아볼 정도로 짙게, 그러나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불과 지난겨울에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각선미가 훤히 드러나는 원피스 차림의 방선희는 화장으로 인해 이목구비가 한결 돋보이는데다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철백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오랜만이네.”


이철백이 먼저 말을 건넸다. 방선희가 새침하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른 손님들이 없어 무료해 하던 종업원이 냉큼 주문을 받으러 다가왔다. 둘은 커피를 주문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휴학계를 냈어?”


“전에 말했잖아. 큰아버지 사업 실패로 내가 돈을 벌어야 된다고. 직장에 다녀.”


“무슨 직장인데 밤새 일하고 아침에 퇴근하니?”


“그냥 조그마한 공장이야. 밤에 일하는 게 수당이랑 월급이 더 많아.”


“아무리 돈도 좋지만 몸 생각도 해야지.”


“잠깐이야. 나도 내년엔 복학해야지.”


방선희의 말을 듣고 휴학 사유를 명확하게 알게 된 이철백은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방선희가 견뎌야 할 삶의 무게에 다소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론 괜찮아 보이는 얼굴과 입성이 이철백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기도 했다. 이철백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땐 바로바로 연락하고 자주 만나자는 당부를 전하며 방선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다가 어느덧 이철백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문학서클 동기생 하나가 선배에게 들었다면서 전하는 말이 방선희가 술집에 나간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선배라는 작자가 방선희와 잠자리까지 함께했다는 것이었다. 이철백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로 끓어올랐고 이내 눈시울을 적시며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분노의 눈물이 선배라는 작자를 겨냥한 것인지 방선희를 겨냥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참을 쏟아내자 응어리가 풀리고 감정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배신당한 허망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지난 번 다향에서 방선희가 공장에 다닌다며 수당이 많은 야간근무를 하러간다고 할 때 이철백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이철백은 술집에 나가면서 공장을 다닌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 방선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철백은 달동네 밑에 오래토록 붙어 서서 방선희의 집을 응시하며 그녀가 외출하기만을 기다렸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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