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한국 사람들은 왜 아무튼이라는 말을 자주 쓸까?

이마루 2022. 8. 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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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 속 '아무튼 ' 대처법

‘뜻밖의’ 기후 위기 속 ‘아무튼’ 지정생존자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2019)를 뒤늦게 봤다. 시작은 비서실장으로 등장하는 대세남 손석구의 티키타카나 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환경부 장관에서 하루아침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꽤 울림 있는 정치를 하는 웰메이드 정치인 박무진(지진희) 캐릭터에 빠져버렸다. 환경 데이터에 정통한 화학자를 지정생존자로 선발한 설정은 주택도시부 장관이 대통령이 되는 원작 미드 〈Designated Survivor〉를 능가하는 현대적 감각이다. 우리는 이미 기후 위기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시공간을 살고 있으니까. 국회의사당 폭발 정도의 국지적 테러가 아니라 지구적 테러 속에서 인류라는 한 종 자체가 지정생존자가 될지 모를 지금, 이 드라마는 우리가 뜻밖의 상황에 부닥칠 때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Netflix, ⓒtvN

‘뜻밖에’ ‘어쩌다’ ‘아무튼’…. 평소 한국인의 정체성을 많이 생각하는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요즘 한국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키워드를 떠올렸다. ‘뜻밖의 여정’ ‘아무튼 OOO’ 등 언젠가부터 예능 프로그램이나 총서 시리즈 앞에 붙는 이 생뚱맞은 부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탈맥락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뭘 해보겠다는 갸륵한 뜻 아닐까? 내가 보기에 한국인은 ‘뜻밖’에 강하다. 또 진심에 열광한다. 굴곡의 역사를 살아낸 한국인은 겉마음과 속마음은 다를 수 있다고 믿기에 겉으로 잘하는 사람 앞에서도 진심을 알기 전까지 긴장을 풀지 않는다. 또 겉모습이 욕쟁이 할머니여도 진심은 다르리라 은근 기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면 ‘뜻밖의’ 상황에서 가장 나종 지니인 ‘진심’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철학자 질 들뢰즈도 그랬다. ‘사유’는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 잘 탄생한다고….

지금은 종영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 71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인의 심리’ 편에는 허태균 심리학자가 등장한다. 그가 분석하는 한국인은 ‘주체성’은 강하지만 ‘자율성’은 낮은 민족이다. 주체성이 자신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인하려는 성향이라면 자율성은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으로, 허 교수는 “한국인은 서양인만큼 자율성이 높지 않지만, 같은 동양권 중에서도 매뉴얼대로 하는 일본인에 비하면 주체성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주체성이 높은 사람은 항상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라고 말하고 행동한다. 지치지 않고 각종 아이디어와 민원을 내는 한국인들을 떠올리면 바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기후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되짚어봐야 할 개념인 ‘주체성’과 ‘자율성’의 은밀한 차이를 상기시킨다. 자율성은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통제 위치(Locus of Control)’라는 개념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좀 더 쉽다. 내적 통제 위치를 가진 사람은 모든 결과가 자기 능력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래서 자기만 열심히 하면 긍정적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지극한 인간중심주의다. 반면 외적 통제 위치를 가진 사람은 일이 자신의 통제 밖에 있으며, 자신은 물론 운명과 행운, 타자와 같은 ‘뜻밖의‘ 외적 요소들이 개입한 복잡성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서양인과 달리 역사는 인간만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외적 통제 위치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면서도 ’아무튼‘ 우리가 행사하는 진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환경을 비롯해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돼 있기에 서로 파괴하면 안 된다고 믿는 만물상관설의 진심과 영향력이다. 그래서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는 오늘날 어쩌다 기후 위기 속 한국인들이 아무튼 대처하고자 방향을 제시한다. 주먹구구 이권이 아닌 데이터로 사유하고, 그것을 의사결정의 근거를 삼아 만물과 소통하는 똑똑한 위정자를 생존자로 지정하고 싶은 우리의 염원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기후가 어떻게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거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박정재 교수는 태양의 흑점 수가 적어질 때 지구에 기상 이변과 화산 폭발, 흉작이 생겼다고 말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의 역사적 배경으로 추측되는 1670~1671년 조선의 ‘경신대기근’이 바로 이때였다. 반면 흑점 수가 많았던 1715~1790년은 역대 최고의 왕으로 꼽히는 조선의 영·정조 치세가 있었다. 2022년 한국은 울진과 삼척에서 역대 최장 기간인 213시간 동안 산불을 경험했다. 꿀벌과 봄 나비가 사라지고 있다. 제트 기류로 역대 최고로 뜨거운 봄에 이어 역대급 폭염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제 한국의 지정생존자 대통령은 태양 흑점 수와 제트 기류까지 모든 데이터를 의사결정의 근거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제 정치는 정쟁이 아닌, 만물의 영향관계 데이터를 먹고 자라야 하니까. 이 뜻밖의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기후 위기에 대처해야 할 시기에 딱 걸쳐진 게 윤석열 대통령 임기(2022~2027년)다. 이 시기, 우리는 이렇게 외치는 웰메이드 대통령을 보고 싶다.

“비서실장, 국무회의 소집하세요. 안건은 온실가스 감축 특별법입니다.”

이원진〈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현재 연세대학교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고 믿는 워킹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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