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에어컨만 있으면 폭염주의보를 피할 수 있을까?

이마루 2022. 8. 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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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추운 곳으로 떠나는 피서

더위를 피할 수 있습니까?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주말, 산책을 나섰다. 가장 볕이 뜨거운 한낮에 굽이굽이 90여 분을 걸었다. 왜 그런 짓을? 지겨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반년 내내 터무니없이 적었던 강수량과 가뭄 또는 단수 뉴스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겨우 장마가 찾아온 지난주에는 옥상에 고인 물이 거실로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겨우 비가 멎자 생전 처음 보는 벌레가 짝짓기하며 날아다니기에 이집트에 재앙을 알린 메뚜기 떼를 생각하며 밤낮으로 창틀을 소독했다. 무섭도록 가물다가 무섭도록 쏟아붓고 마침내 신종 벌레 집단을 출현시키는, 내가 손쓸 도리 없이 벌어지는 자연의 일들. 기후 변화라는 거대하고도 막연한 공포를 모처럼 실감하며 무력하게 집 안을 쓸고 닦았다. 장마와 벌레 떼에 이어 찾아온 폭염의 날에 밖으로 나선 것은 그런 무력감을 깨보려는 야심이었다.

산책은 잠시 기분을 괜찮게 해주었지만, 과연 자연은 상냥하지 않았다. 그사이 더위를 먹어 사흘 정도 빌빌거렸다. 평소 잘 견디던 온도에서 계속 열이 솟았고, 그런데도 이상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가만있지 못하고 부산을 떨었다. 틈만 나면 바닥을 쓸고 닦고, 배수구를 소독하고, 온 집 안의 제습제를 갈아 끼우고 주방 전자기기를 분해해 기름때를 빼면서 땀을 쏟아냈다. 지구가 더 이상 나를 여기에 살게 해줄 것 같지 않은 감각 속에서 이 15평 공간만이라도 닦고 닦아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였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신에게 바치는 공양의 노동이었는지 모르겠다.

ⓒUnsplash

먹은 더위가 며칠에 걸쳐 소화되면서 천천히 제정신을 찾았지만 폭염만 문제가 아니었다. 뉴스 속 정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고, 미국에서 낙태죄가 부활하고 전염병 재유행이 돌아올 거라고 했다. 유례없는 물가 상승이 보도되고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줄었으며, 식량 위기가 예견됐다. 잔잔한 불안이 폭염처럼 나를 에워싼 채 쭉 곁에 머물렀다. 동네에서 사랑받는 매운 냉면집은 오후 4시에도 만석이었다. 이상고온 시대의 사람들은 점심 먹고 커피 마신 뒤 냉면을 먹기 시작한 것일까? 겨우 배를 차갑게 채웠지만 가게를 나오는 순간 푹 익은 대기가 또다시 나를 포위했다. 무력한 채 구원을 바라듯 중얼거렸다. 더, 더, 더 차가운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춥다는 러시아 야쿠츠크로 피서를 시도했다. 봄에 읽다가 “한여름에 다시 읽을래”라고 메모해 둔 책을 펼쳤다. 야쿠츠크의 겨울은 영하 45~50℃ 정도로, 날아가던 작은 새가 얼어서 떨어지는 기온이다. 커다란 생선들을 바게트 빵처럼 세로로 꽂아두고 판매하는데, ‘상온’에서도 완전하게 얼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민들은 식수로 호수의 얼음을 녹여 먹는다. 호숫가에 쌓인 얼음 덩어리에는 주인이 있어서 남의 얼음 덩어리에는 서로 손대지 않는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이들은 자신의 얼음 덩어리를 갖게 되는 걸까? 얼음 덩어리라는 다섯 음절을 반복해 읽는 동안 조금 숨쉬기가 편해지는 듯했다.

그 다음은 북극의 빙하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북극은 결코 하얗지 않다. 책에는 수많은 빛깔을 내는 얼음들의 정경이 펼쳐진다. 수줍은 빙산과 단호한 빙산이 있다. 그 빙산을 낳는 빙하가 있다. 늙은 얼음과 어린 얼음이 공생하는 이 세계는 빛을 왜곡하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시각보다 청각을 신뢰한다. 고위도 지방의 긴긴 밤과 긴긴 낮, 극야와 백야. 백야의 계절 러시아에서는 서산에 걸리자마자 다시 동쪽으로 떠올랐다는 태양이 북극에서는 지지 않고 하늘을 돌고 또 돌았다.

그 차이만큼 내가 북쪽으로 더 도망쳐 왔다는 걸 알았다. 비교적 굳건한 지구의 자전축, 인간이 멸종해도 영속할 땅을 생각하니 허깨비 같던 불안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동시에 극지방으로의 짧은 피서를 중단했다. 지금 나의 불안은 폭염이 아닌 인간의 문제이며, 피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 인간의 지구 착취로 만년설이 녹고 빙하가 사라져 북극곰이 디딜 곳을 찾아 헤엄치다 지쳐 죽는 이야기를 아는 채로 얼음의 땅에서 위안을 구할 수는 없다. 러시아 호숫가에는 얼음 덩어리가 얼마든지 평화롭게 쌓여 있겠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인간은 이웃 나라를 불사르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애초에 폭염을 핑계 삼은 내 불안과 위기감은 도망칠 수 없는 업보에서 왔다. 출퇴근에 이용할 수 있는 차가 있고, 집과 사무실에 에어컨이 있는 환경에 살면서 덥다고 엄살을 떠는 이유도 같다. 그렇게 살아왔고, 또 살고 있기에 폭염의 죄의식에 압도당한 것이다.

북극 꼭대기까지 가보고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시 서울의 7월이라는 현실과 마주한다. 환경 부담을 줄이는 미약한 실천을 이어가면서 자고 깨고 일한다. 좋은 글을 찾고 책을 만든다. 그리고 가끔 또 인간답게 도망간다. 우주로 가면 인간이 이론으로 가정할 수 있는 가장 차가운 온도인 절대영도(-273.15℃)를 만날 수 있다. 절대영도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것은 부메랑 성운으로, 지구에서 5000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 우리는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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