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겪은 '처음'에 대해서, <여름과 루비>

김초혜 2022. 8. 12.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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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혼자 놀기의 달인’인 저는 서점에 자주 갑니다. 새로 나온 잡지를 쓱 훑어보기도 하고, 각종 서점 매대의 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니까요. 박연준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던 건 2014년 산문집 〈소란〉이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 베스트 셀러 매대에 올라가 있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독보적인 명랑함을 장착한 채 태어난 것 같은 작가가 자신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을 투명하게 펼쳐내 인상적이었어요. 남편 장석주 작가와 시드니를 여행하며 함께 쓴 〈우리는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 시간 박연준 작가의 신간 행보를 따라왔던 제가 이번에 고른 책은 그의 첫 소설 〈여름과 루비〉입니다.

「 “할머니는 나를 두고 일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쓰다듬고 쓰다듬었다. 어루만져서 좋아지는 게 세상에 있다는 듯이. 그 있음을 보듬는 눈빛과 손길로 나를 만졌다. 나는 할머니 손에서 다시 빚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고요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길에서만 존재의 당위를 얻었다. 그럴 땐 할머니가 나를 낳았어야 했다고. 내 엄마여야 했다고 생각했다.” 」

첫 슬픔, 첫 기억, 첫 배신, 첫 과거, 첫사랑. 소설은 우리가 마주했던 첫 번째 순간에 대해 주목합니다. 주인공 여름이는 초경을 처음 목격한 날 ‘팬티에 똥 같은 것이 묻었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첫 번째 생리대를 착용하고 어기적거리며 걷던 아이는 피 묻은 속옷을 빨고, 침대에 누워 몸의 고단함에 울기도 합니다. 남동생을 갖게 된 기억에 대해서는 ‘집안에 존재하는 하나뿐인 남자아이로서 ‘태연하게’ 사랑스러웠다. 내가 갖고 싶은 모든 걸 그 애는 가진 것 같았다’고 회상합니다. 작가 박연준은 누추한 마음과 슬픔까지도 기어코 포장하려 들지 않아요.

시인이자 수필가인 박연준은 왜 돌연하게 소설책을 냈을까요? 작가는 삶의 ‘찢어진 페이지’를 소설이란 장르로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여름과 루비〉 속 낱낱한 감정은 우리가 유년 시절에 느꼈던 기억을 또렷하게 되살려내요. 책을 다 읽고 나면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오늘이 너무 바빠서' 이미 지워버린 감정들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어쩌면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어린 나'의 눈엔 오늘의 아픔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요. 오랜 시간 남아 있는 흉터는 자신을 깊게 이해할 수 있을 때만 사라질 수 있을 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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