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에서 제주도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

이준목 2022. 8. 1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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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JTBC <세계 다크투어>

[이준목 기자]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 JTBC
 
20세기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은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를 위협했다. 특히 한국은 일제의 침탈로 인하여 36년간 주권을 잃고 치욕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강제징용과 위안부 등으로 많은 무고한 한국인들이 억울하게 수탈당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희생당해야 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지말아야 할 슬픈 역사다.

8월 11일 방송된 JTBC <세계 다크투어>에서는 8.15 광복절을 맞아 진주만에서 군함도, 군산, 제주도 등으로 이어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그날'의 아픈 역사속 현장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박광일 역사여행작가가 강연자인 이날의 '다크 가이드'로 나섰다.

제국주의 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 합병 과정과 1차대전의 승전국 등을 거치며 '전쟁특수'를 통하여 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93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대공황으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면서 일본도 궁지에 몰렸다. 당시 강경파들이 득세한 일본은 경제적 불황을 전쟁으로 해결하자는 극단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

일본은 1930년대 만주침공과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공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팽창주의 야욕을 드러낸다. 이러한 일본을 주시하며 견제한 것이 미국이었다. 미국의,강도 높은 경제 제재로 일본은 필수적인 전쟁물자인 석유와 철강의 수입이 막혀 궁지에 몰리자, 일본은 급기야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도박을 선택한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은 미 해군의 주력인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켜 유리한 상황에서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일본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전쟁계획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이뤄진 것이 조선과 만주국 등 일본의 지배를 받던 지역에서의 수탈이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이미 이전부터 인적-물적의 자원의 약탈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2차대전기에 돌입하며 일제의 수탈은 더욱 노골적이고 극악해졌다.

일본 나가사키 반도 옆 관광지로 유명한 다카시마 지역에 위치한 하시마 섬은 군함처럼 생겼다는 이름으로 군함도(軍艦島)라는 별칭이 붙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곳에서는 약 80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지하 해저 탄광에서 쉬는 날없이 하루 12~16시간 동안 석탄을 채굴하는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평균 45도가 넘는 고온과 95%에 이르는 습도, 언제 질식할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하고 낙후된 환경에서 조선인들은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작업을 이어갔다. 중노동과 굶주림으로 군함도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은 약 13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군함도는 현재 무인도지만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로 변했다. 일본이 군함도를 홍보하는 목적은 '아시아 최초의 산업혁명을 일본에서 일으켰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현지 가이드들은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비롯한 어두운 역사는 쏙 빼놓고 이야기했고, 정작 군함도 전체지역의 3/4에 이르는 강제노역 장소나 흔적들은 공개를 거부하고 있었다.

강제노역은 군함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인 중 강제노역에 동원한 인원은 약 70만에 이르며 이들은 군함도 외에도 다양한 지역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도 당시 조선인들을 강제노역이 아닌 '돈을 벌러 자발적으로 온 노동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강제노역의 증거가 남아있는 역사적 현장들은 일반인들에게 철저히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유일하게 일제의 강제징용 박물관중 공개가 허용된 곳이 단바 지역에 위치한 망간광산지 기념관이었다. 이곳에는 강제징용에 대한 조선인 노동자의 동상이 건립되어있으며 어깨에는 태극기가 걸려있다.

이 기념관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 정부나 공공기관이 세운 게 아닌 바로 16세부터 이 곳에 끌려와 노역을 했던 피해자인 고 이정호 선생이 건립한 덕분이었다. 이정호 선생은 "조선인의 아픈 역사를 남겨둬서 일본인들에게도 기억하도록 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역사의 기록을 남겨놓은 것.

단바지역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3평 남짓한 공간에 약 20명이 거주했으며, 반복되는 중노동과 굶주림, 폭행까지 당하면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도 받지못하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상당수가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렸고, 무거운 채굴-망간을 운반하면서 '어깨살이 문드러지고 척추뼈가 내려앉았으며 발가락이 으스러져서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할 만큼 온갖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고.

일본 우익과 혐한 세력들은 여기서도 조선인 강제노역이 아닌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념관 건립을 방해했다. 하지만 이정호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으로 직접 건너와 사비를 들여 강제노역자들을 인터뷰하고 증거를 확보했고 1989년에 결국 단바 망간기념관을 건립하는 데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선생은 1995년 강제노역의 후유증인 전폐증으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망간기념관은 아들인 이용식씨가 물려받아 2009년 폐관의 위기를 극복하고 2012년 재개관하여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박광일은 "역사는 그 현장이 있어야 힘이 있다"고 주장하며 일제의 수탈 속에 고생한 선조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망간기념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망간기념관은 일본의 역사왜곡으로부터 우리 역사를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자 증거다.

한편 태평양 전쟁으로 전쟁물자가 갈수록 부족해진 일본은 식민지에 대한 수탈정책을 극대화한다. 고철부터 요강, 놋그릇까지 공출하여 무기화했고, 국유림과 사유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벌채하여 목재를 충당했다. 또한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대거 착취하여 전쟁물자를 생산해냈으며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성착취를 당했다. 위안부 피해자 일부는 일본군에 학살당하거나 암매장되기도 했다. 남성들은 일본군에 끌려가 강제로 전쟁터에 나서야 했다.

또한 일본은 전쟁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조선의 쌀을 수탈했다. 일제의 쌀 수탈 흔적이 남아있는 대표적인 도시가 군산이다. 일제는 군산항에 쌀 수탈을 위한 전초기지를 만들고 신작로와 철도를 개통하는 등 많은 시설이 건설됐다. 당시 조선에서 생산된 모든 쌀은 군산으로 집결되었다. 일본인 농장주들은 조선인 소작농에게 착취한 쌀을 일본으로 운송했다.

일본 우익이나 친일세력들은 종종 '조선의 발전과 근대화를 위한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일제강점기의 폭정을 합리화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호남의 주요도시가 광주나 전주였다면, 일제시대에 군산과 목포 등이 주요 거점이 된 이유는 이 지역이 접근성이 좋아서 수탈과 운송에 용이한 항구도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이 건설한 국도 1호선은 서울에서 목포, 2호선은 목포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쌀 수탈용 목적의 루트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절반 이상이 일본으로 강제 유출되면서 그만큼 많은 조선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일본이 주장하는 근대화의 실체란 오로지 수탈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군산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제체제의 흔적들을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지역이다. 옛 군산세관, 구 일본 제18은행(현 군산 근대미술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현 군산 근대건축관) 등은 아직도 건물이 보존-복원되어 지난 역사의 아픔을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있다.

일본이 경제침탈을 위하여 꺼내든 또다른 수단은 화폐를 이용한 금융정책이었다. 일본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은행권이라는 화폐를 발행했고, 명목상은 조선의 화폐였지만 철저히 일본을 위한 방식으로 이용했다. 통화남발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인들이 감당해야했다. 

조선인들은 은행 대출시에도 일본인들에 비하여 노골적인 차별을 받아야 했다. 한반도내 은행들은 일본인들에게는 저금리로 대출을 해주고, 일본인들은 다시 조선인들에게 고금리로 대출하는 구조로 고리대금업이 만연하고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더욱 심화됐다.

일본인들은 훌륭한 생산력과 소작농들을 보유한 조선의 토지를 싼 값에 대거 독점하려는 부동산 투기가 만연하며 대지주들이 대거 탄생했다 특히 구마모토 리헤이라는 인물이 소유한 땅은 현재 여의도의 10배 면적에 이르렀다.

군산의 또다른 일본인 대지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는 건물 하나를 개인금고로 만들어 현금과 재산 문서는 물론, 조선에서 불법으로 약탈해온 문화재들을 보관하기도 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시마타니가 빼돌리지 못한 유물 일부는 그대로 보존되었고, 금고가 있던 위치는 현재는 초등학교 건물이 됐다.

이밖에도 당시 일본인들의 문화재 약탈과 수집은 당시 한반도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오쿠라 기하치로-오쿠라 다스노스케같은 약탈자들은, 고려 이층오천석탑, 평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 조선시대 문인석 등 수많은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빼돌렸으며 지금까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이러한 일제의 만행으로 고통을 받는 동안, 일부는 오히려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이찬, 주요한 등은 1941년 당시 일제의 진주만 공습을 찬양하는 시를 언론에 올리기도 했다.
 
  JTBC <세계 다크투어>의 한 장면.
ⓒ JTBC
 
하지만 진주만 공습의 일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 밀려 점점 패색이 짙어진 일본은 전쟁 후반기에 이르러 '카미카제(전투기)' '가이텐(어뢰)' '신요(보트)' 등으로 불리우는 자살특공작전을 시도하기도 한다. 사람이 조종하는 비행기, 어뢰, 보트에 폭탄을 싣고 상대 진영에 돌진하여 자폭한다는 발상은, 한마디로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내세운 최악의 작전이었다. 일제가 인간과 전쟁을 바라보는 인식이 어떤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중에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터에 끌려가 희생당해야했던 조선인들도 있었다. 일본에서 '특공대'를 뜻하는 말인 톳고다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종종 잘못 사용하는 '독고다이'라는 은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역사속의 그들은 특공대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른 사람들일 뿐이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관광도시인 제주도 역시 당시 전쟁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방어를 위한 최후의 저지선으로 제주를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현재 성산 일출봉 해안에는 일제가 건설한 동굴진지들이 남아있다. 내부는 동굴을 깎아 시멘트를 발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 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제주도의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됐다.

제주 남서쪽에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겨냥하여 일제가 건립된 알뜨르 비행장이 있었다. 안쪽에는 전투 비행기 격납고와 급수시설, 지하에 위치한 지휘소 벙커, 고사포 진지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모든 것이 일제의 야욕을 위하여 조선인들의 노동력과 국토가 수탈된 역사의 흔적들이다. 겉보기에 평화로운 제주도의 외경과는 상반되는 군사 시설들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주는 이질감은, 일제에 의하여 아름다운 내 땅까지 전쟁요새로 만들어야했던 당시 선조들의 비애가 느껴진다.

1945년 2월만 해도 약 2천 명에 불과했던 일본군은 전쟁 막바지 약 6개월 만에 6만 명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30만에 이르는 제주도민을 인질로 잡고 제주도를 최전선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증거들이다. 본토에 연이은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제주도 역시 수많은 피를 부르는 또다른 비극적인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조종사였던 폴 티베트는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처럼 검은 연기가 우리를 집어삼킬 듯 위로 끓어올랐다"고 회고했다. 이 한 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히로시마는 폐허가 됐다. 그럼에도 항복하지 않던 일왕은 8월 9일 나카사키에 제2의 원폭이 투하되고 나서야 8월 15일 비로소 항복을 선언한다.

항복선언 이후 일본이 곧바로 조선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9월 8일 조선총독부의 깃발이 일장기에서 미국의 성조기로 바뀌었고, 9월 28일에는 제주에서 일본의 두 번째 항복선언이 나온다. 당시 제주에 아직 6만에 달하는 군사력이 건재했기에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고 그들을 차례차례 퇴각시킬 작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길고 잔혹했던 일제의 침략은, 그렇게 제주도에서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은 일본에 이어 제2의 원폭 피해국가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 곳곳에 끌려간 조선인들의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나카사키 원폭 투하 당시 사망한 7만 명 중 약 1만 명이 조선인이었으며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일제는 아비규환이 된 피폭 현장에 또다시 조선인들을 투입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조선인 피폭 피해자들은 치료에서도 일본인들에 비하여 후순위로 밀렸다.

이처럼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우익성향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지금도 '역사왜곡의 조기교육화'를 통하여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조작하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우리가 더 역사에 잘알고 더 깨어있어야 왜곡에 맞서 올바른 진실을 지킬수 있다. 때로는 이념과 진영에 따라 역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사실에 기반한 올바른 역사는 대한민국 모두가 공유하고 같은 마음으로 한목소리를 내야 할 소중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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