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문화재전쟁] 한국사 시작 알린 고조선 유물, 중국은 왜 부정하나

입력 2022. 8. 12. 00:30 수정 2022. 8. 12. 05:3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비파형동검의 비밀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우리가 중·고교 역사 시간에 배운 고조선을 대표하는 청동기 유물이다. 모양이 동아시아 전통 현악기 비파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한국문화의 중심지인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실에도 전시돼 있다.

박물관 고조선실 비파형동검 가운데 휘어지고 부러져서 관람객 대부분이 주목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한데 이 동검에는 놀라운 사연이 숨겨져 있다. 20세기를 달군 고조선 역사전쟁을 촉발시켰다. 이 유물은 약 60년 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시 근처에서 북한과 중국의 학자들이 공동 조사한 고조선 무덤에서 출토됐다.

「 1964년 북한·중국 다롄에서 발굴
“고조선은 있었다” 고고학적 입증

만주사 편입한 중국의 태도 급변
고조선 지우고 동북공정 본격화

2006년 한국 특별전에서 첫 공개
‘60년 역사전쟁’ 지금도 진행 중

이 동검이 발굴되며 고조선은 신화가 아닌 실제 역사로 증명됐다. 반면 반작용도 있었다. 중국 측이 만주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끌어들인 동북공정과 중화사관의 출발점이 됐다. 일면 초라해 보이는 이 유물 뒤에 숨어 있는, 고조선을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60년 역사전쟁을 들여다본다.

소련이 지워버린 한반도 역사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고조선 비파형동검. 1964년 북한·중국 조사단이 중국 다롄시 강상무덤에서 찾아냈다.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알리는 유물이다. 당시 무덤에서 화장을 하는 풍습 때문에 그 열기로 동검이 심하게 휘어졌다. [사진 강인욱]

한국전쟁 종전 직후인 1955년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은 사회주의에 입각한 10권짜리 『전세계사』를 간행했다. 사회주의권의 여러 나라에서 정사처럼 통용될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북한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한국 고대사의 시작 대목에서 고조선에 대한 언급없이 중국인 기자(箕子)가 건너왔다는 전설과 한사군만을 서술한 것이다. 또 실제 한국인이 만든 국가의 출발을 삼국시대로 규정했다.

사실 소련이 한국을 특별히 폄하하려는 뜻은 없었다. 한국사 전공 학자가 없었던 시절이라 보로비요프라는 일본 고대사를 주로 연구하는 학자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베껴 쓴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의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시절이었지만 북한은 큰 위기감을 느꼈다. 자칫하면 이 책 때문에 사회주의권 국가에 한국은 고대부터 식민지였다는 오해를 줄 수 있어서였다.

북한 당국은 대응에 나섰다. 갓 독립한 북한의 위치가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판단에서 중국과 협력하여 고조선의 실체를 밝히는 것에 국가적인 역량을 집중했다. 당시의 중국의 사정은 지금과 달랐다. 1949년 중국을 통일한 중국 공산당은 역사적으로 한국의 일부였던 간도 지역을 차지했고, 북한은 중국에 이런 사실에 거세게 항의하던 시점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실 에 전시된 비파형동검. 강상 비파형동검(빨간 선 안)은 북한 소장품을 국내 전시 후 복제한 것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새로운 국가를 수립했지만 나라의 기반이 약했던 중국은 북한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은 고고학 연구서에서 고구려 관련 부분을 자체적으로 검열해서 삭제할 정도였다. 북한은 먼저 1958년 역사학자 리지린을 베이징대에 보내서 고조선을 연구하도록 했다. 또 외교적인 채널을 가동해 중국과 이 문제를 협의했다.

북한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중국 초대 국무원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가 1963년 6월 북한 학자 20여 명 앞에서 만주는 한국사의 일부라는 점에 수긍하고, 중국과 북한이 만주에 있는 고대 한국사 유적 공동조사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후 1963~1965년 3년간 만주 일대에서 유적 발굴이 진행됐다. 사회주의 중국 설립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한국사 공동 발굴이었다.

비파형동검 찾아낸 북한 발굴단

현재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강상무덤 유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은 연구자를 두 팀으로 나누어 각각 고조선과 고구려·발해를 연구하기로 했다. 고조선연구단장은 고조선 연구로 베이징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리지린이었다. 중국에 유학해 현지 사정에 밝았던 리지린이었지만, 그는 문헌만 연구하던 역사학자여서 실제 유물은 잘 몰랐다. 그는 고조선 수도인 왕검성과 고조선 국경인 패수를 찾아서 주로 옛 성터를 찾았다.

하지만 고고학자가 수십 년 발굴·조사해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이 국가이고 문명이다. 10명 남짓한 조사단이 1~2개월 광활한 만주를 헤맨다고 2000여 년 전의 성터와 국경을 찾을 리가 만무했다. 또 어렵게 성터를 찾았다고 해도 대부분 명나라 시대의 것이었다. 여기에는 북한 측의 의도를 파악하고 소극적으로 협조한 중국의 계산도 작용했다.

고조선의 수도를 찾으려던 리지린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조사 만료시한 2년을 앞두고 북한 발굴단은 작전을 바꾸었다. 리지린이 뒤로 물러나고 고고학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문헌보다 고고학 유물에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1964년 다롄시 해군기지 근처에서 발굴된 돌무덤 2개를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큰 것은 ‘강상(崗上)’이라 불리는, 길이 100m가 넘는 고분이었다. 약 144명이 묻힐 정도의 대형 무덤으로, 그 안에서 비파형동검도 함께 발견됐다. 북한은 애매한 왕검성 대신에 비파형동검이라는 실물 자료로 고조선을 증명할 수 있었다.

강상 유적을 발견한 데는 운도 따랐다. 북한 학자들은 다롄시 근처를 답사하면서 다른 청동기시대 집자리를 찾다가 해당 돌무더기 벽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고구려 돌무덤이 아닐까 추정했는데, 조사 결과 그보다 훨씬 앞선 고조선 무덤으로 판명됐다. 이 조사를 기점으로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로 인정받았다. 중국 측의 방해, 남북 분단을 넘어서 고조선의 실체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한 순간이었다.

중화사관 촉발한 고조선 전쟁

북한·중국 조사단이 1964년 고조선 유적을 발굴하는 모습.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은 고조선의 역사가 밝혀지는 과정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다. 무엇보다 만주지역에 대한 영유권 때문이었다. 그 시작은 일본의 만주국이었다. 일본이 1930년대 만주국을 내세워서 25년 가까이 지배했는데, 이제 다시 그 땅을 북한에 앗길까봐 극도로 민감한 상태였다. 결국 조사는 2년 만에 마무리됐고, 마지막 3년차에는 거의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도 고강도 대응에 나섰다. 북한의 발굴을 이끈 리지린을 학문적인 간첩으로 몰고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다. 뒤이어 1966년에는 중국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중국 당국은 소련과 영토분쟁을 일으키며 주변국과 모든 교류를 막았다. 자국 내 유적에 대한 주변국의 접근을 막고 철저히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만주의 모든 역사를 중국에 귀속시키는 중화사관에 입각한 역사관을 밀어붙였다.

더욱이 북한과 했던 공동 발굴 사실 자체를 부정했고, 만주 지역의 고고학 연구에서도 ‘고조선’이라는 이름은 금기시했다. 최근까지도 만주 일대의 중국 박물관에서는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연나라 장수 진개나 한무제의 정벌은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정작 그들과 싸운 고조선의 이름은 지워버렸다.

이렇듯 60년 전 조·중고고발굴대(북한과 중국의 공동발굴단)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고조선 연구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사회주의 형제라는 북한과 중국의 역사 인식은 이때를 기점으로 서로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됐다. 북한은 고조선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를 확인했고, 중국은 강력한 중화사관을 주장했다. 중국의 ‘동북공정’ 사업은 공식적으로 2002년 시작됐지만, 그 씨앗은 1930년대 일본의 만주 침략에서 태동됐고, 북한과의 고조선 전쟁으로 가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전시된 북한 문화재

북한과 중국의 고조선 발굴 유물이 어쩌다 한국에서 전시됐을까. 공동 발굴 당시 중국과 북한은 유물을 선별해서 반반씩 나누기로 했다. 비파형동검을 포함한 중요 유물의 반을 북한에서 가져갔다. 그리고 2006년에 ‘북녘의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북한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 유물 90여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됐다.

그때 전시품 중에 예전 다롄시에서 발굴한 비파형동검도 포함됐다. 필자는 석사 논문을 만주의 비파형동검으로 썼으면서도 정작 실물을 볼 수 없었는데, 생각하지도 않게 서울의 한가운데서 해당 동검과 마주하면서 반쯤은 넋이 나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중앙박물관 측은 유물을 북한에 반환하기 전에 복제해두었고, 현재 고조선실에 진열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은 지금껏 수많은 갈등을 겪어왔지만, 한국사의 출발인 고조선과 비파형동검에 대해선 한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작은 동검 하나에서 60여 년간 이어진 한국과 중국의 역사전쟁, 그리고 고조선에 대한 남북의 한결같은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